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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전드 스토리] <74> '마지막 완투형 에이스 ' 로이 할러데이

야구상식

by jungguard 2021. 1. 8.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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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이 된 로이 할러데이

 

조 맥기니티의 별명은 철인(Iron Man)이었다.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인 아버지가 아일랜드 감자 대기근(1847) 이후 미국으로 건너온 맥기니티는 광부였다. 그리고 주물공장에서 일하며 메이저리그를 꿈꿨다.

 

1899년 28살의 나이로 메이저리그 투수가 된 맥기니티는 하루 두 번의 선발 등판은 물론 '더블헤더 완투'를 달성하는 등 괴력을 뽐냈다. 이에 '철을 다루는 사람'이었던 맥기니티의 별명(Iron Man)은 지치지 않는 투수 또는 선수를 지칭하는 말이 됐다.

 

2632경기 연속 출장을 달성한 칼 립켄 주니어와 함께, 로이 할러데이는 우리가 목격한 마지막 철인이었다.

 

철인의 시작

 

콜로라도주 덴버가 고향인 할러데이는 어릴 때부터 야구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할러데이는 놀란 라이언을 꿈꾸며 라이언의 개인 코치였던 톰 하우스의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지하실에 할러데이를 위한 마운드를 만들어준 아버지는 아들의 재능을 확인한 후 지역 내 최고의 피칭 전문가(guru)인 버스 캠벨에게 데려갔다. 캠벨의 제자 중에는 명예의 전당 마무리 리치 고시지가 있었다. 할러데이의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본 캠벨은 일주일에 두 번 할러데이를 가르쳤다. 그리고 수업료를 받지 않았다.

 

고교 졸업반인 할러데이가 1995년 드래프트에 나왔을 때 그를 눈여겨 본 팀은 필라델피아 필리스였다. 그러나 필라델피아는 1라운드 14순위로 투수가 아닌 야수를 택했다. 필라델피아가 할러데이를 뽑았다면 할러데이는 커트 실링의 뒤를 이어 필라델피아의 에이스가 됐을 것이다. 그리고 2008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함께했을 것이다.

 

할러데이를 데려간 팀은 스승 버스 캠벨이 스카우트로 있는 토론토 블루제이스였다. 토론토는 할러데이의 체격을 마음에 들어했다. 토론토의 1993년 15순위 지명자 크리스 카펜터와 1995년 17순위 지명자 할러데이는 모두 198cm의 장신이었다. 할러데이는 캠벨에게 괘종시계를 선물했다. 그리고 메이저리그에 승격되자 자신의 등판을 보실 수 있도록 댁에 위성 방송 안테나를 달아줬다.

 

1975년생인 카펜터는 1997년 5월, 1977년생인 할러데이는 1998년 9월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하지만 1992년과 1993년 월드시리즈 2연패를 달성했던 토론토의 파티는 이미 끝난 후였다. 토론토는 할러데이가 있었던 12년 동안 대부분 긴축 재정을 했다.

 

데뷔 두 번째 경기. 21살의 할러데이는 대기록에 도전했다. 9회 2사까지 볼넷과 안타 허용 없이 디트로이트 타선을 실책 하나로 봉쇄한 것. 그러나 할러데이는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남겨 놓고 대타 바비 히긴슨에게 홈런을 맞았다. 지금까지 데뷔전에서 노히터를 따낸 투수는 없으며 두 번째 경기에서 달성한 선수는 1991년 윌슨 알바레스(시카고 화이트삭스)와 2007년 클레이 벅홀츠(보스턴)뿐이다.

 

총잡이의 탄생

 

1999년 풀타임 첫 시즌 성적이 준수했던 할러데이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2000년 할러데이는 19경기(13선발)에서 4승7패 10.64를 기록함으로써 한 해 10경기 이상 선발로 나선 투수 중 역대 최악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할러데이의 기록은 2011년 브라이언 매터스(볼티모어)가 12경기에서 1승9패 10.69를 기록하고 경신했다.

 

마이너리그로 내려가고 나서도 갈피를 잡지 못하던 할러데이 앞에 두 명의 새로운 스승이 나타났다. 토론토의 인스트럭터 멜 퀸과 스포츠 심리학자 하비 도프먼이었다. 캠벨이 따뜻했다면 퀸은 차가웠다. 퀸은 할러데이의 망가진 투구폼을 바로잡아줌은 물론 때론 모욕적인 언사를 써가며 할러데이에 내재된 승부의 화신을 일깨웠다.

 

어릴 적 톰 하우스의 피칭 교본을 읽고 또 읽었던 할러데이는 이때부터는 도프먼의 책을 품고 살았다. 할러데이는 부진에 빠질 때마다 도프먼의 책을 읽었고 그래도 해결이 안 되면 이메일로 상담을 받았다. 2001년을 싱글A부터 다시 시작한 할러데이는 더블A와 트리플A를 거치고 돌아왔다. 그리고 질주를 시작했다.

 

할러데이는 팀 아나운서인 톰 칙으로부터 닥(Doc)이라는 멋진 별명을 선물 받았다. 할러데이(Halladay)가 실존했던 서부시대의 인물로 치과의사이자 총잡이였던 닥 할러데이(Doc Holliday)와 이름이 거의 같았기 때문이었다. 할러데이는 토론토의 닥(Doc)이었다. 상대 에이스와 결투를 승리하는 총잡이이자 아픈 충치를 빼주는 치과의사가 됐다.

 

할러데이는 2002년 처음으로 올스타가 됐다(239.1이닝 19승7패 2.93). 2003년은 사이영상 투수가 됐다(266이닝 22승7패 3.25). 2003년 할러데이는 9월 6경기에서 5번의 완투를 만들어냈다. 그 중 한 경기는 10이닝 무실점 완봉승이었다. 할러데이는 1991년 월드시리즈 7차전의 잭 모리스(미네소타) 이후 처음으로 10이닝 완봉승에 성공한 투수가 됐다(이후 2005년 마크 멀더가 마지막으로 달성).

 

그러나 또 시련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부상이었다.

 

마리아노 리베라

 

컷패스트볼(이하 커터)은 할러데이에게 중요한 공이었다. 하지만 커터를 던지면 극심한 통증이 찾아왔다. 2004년을 부상으로 망친 할러데이는 2005년 커터를 자제했다. 그 해 할러데이는 사이영상 시즌을 만들어가던 도중 케빈 멘치(텍사스)의 타구에 정강이 골절상을 입고 시즌을 마감했다(18경기 12승4패 2.33). 2006년 할러데이는 커터를 다시 꺼내들었다. 그러나 커터를 던질 때마다 팔의 수명이 줄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2007년 중반 할러데이는 떠돌이 포수인 살 파사노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놨다. 파사노는 할러데이에게 그립을 바꿀 것을 제안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고통이 사라졌다. 그 해 올스타전에 출전한 할러데이는 마리아노 리베라를 찾아가 한 번 더 그립 수정을 받았다. 리베라의 조언대로 지지대 역할을 하는 엄지 손가락을 더 깊게 집어넣자 커터의 움직임이 더 좋아졌으며 제구도 한결 수월해졌다.

 

파사노와 리베라의 도움으로 얻은 2.0 버전의 커터는 실로 무시무시했다. 2008년 할러데이는 클리프 리(클리브랜드)에 이어 사이영상 2위에 올랐다(246이닝 20승11패 2.78). 2009년 활약 역시 뛰어났다(239이닝 17승10패 2.79). 할러데이가 2008년 양키스전 6경기에서 5승1패 2.40, 2009년 5경기에서 3승1패 2.70을 기록하자 양키스 선수들은 왜 알려줬냐며 리베라를 타박했다.

 

할러데이의 첫 번째 목표는 토론토에서의 은퇴였다. 시즌 때는 혼자 토론토에서 지내고 시즌이 끝나면 미국으로 돌아가는선수들과 달리 할러데이는 가족이 모두 토론토로 옮겨와 살았다. 2004시즌이 끝나고 FA가 될 수 있었던 할러데이는 2004년 4년 4200만 달러, 2008년 3년 4000만 달러에 흔쾌히 도장을 찍었다. 에이스의 연봉은 이미 2000만 달러를 넘어선 상황이었다. 그러나 토론토는 계약 종료 1년을 남기고 할러데이를 배신했다. 할러데이를 트레이드 시장에 내놓았다.

 

할러데이가 눈엣가시였던 양키스와 보스턴은 서로 할러데이를 데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두 팀 중 한 팀으로 보냈다가는 가뜩이나 분노한 팬들이 폭동이라도 일으킬 것 같았던 토론토는 할러데이를 서부(LA 에인절스)로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에인절스는 아트 모레노 구단주가 에릭 아이바(유격수)는 줄 수 없다며 거절했다. 할러데이는 필라델피아의 차지가 됐다. 1995년 고교 졸업과 함께 필라델피아에 뽑힐 뻔했던 할러데이는 2010년 최고 투수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필라델피아에 입단했다.

 

내셔널리그 타자들은 악몽이 시작됐다. 할러데이는 내셔널리그를 폭격했다.

 

필라델피아 필리스

 

2010년 할러데이는 33경기에서 250.2이닝을 던짐으로써 27개 중 23개의 아웃카운트를 책임졌다. 9번의 완투는 2위 애덤 웨인라이트(세인트루이스)보다 네 번이 더 많았다. 통산 7차례 1위에 오른 할러데이보다 완투 1위에 더 많이 오른 선수는 워렌 스판(9회)이 유일하다.

 

2010년 할러데이는 게일로드 페리, 로저 클레멘스, 랜디 존슨, 페드로 마르티네스에 이어 역대 5번째 양 리그 사이영 투수가 됐다(이후 맥스 슈어저가 달성). 5월30일 플로리다전에서는 2004년 랜디 존슨 이후 처음이자 역대 20번째 퍼펙트게임을 달성했다. 그리고 디비전시리즈 1차전 포스트시즌 데뷔전에서는 1956년 돈 라슨(뉴욕 양키스) 이후 처음이자 역대 두 번째로 포스트시즌 노히터에 성공했다. 한 해 퍼펙트게임과 노히터를 모두 달성한 투수는 할러데이가 최초였다.

 

2010년에 272.2이닝을 던진 할러데이는 2011년에도 최고의 활약을 했다. 사이영상 투표에서는 클레이튼 커쇼(LA 다저스)에게 밀려 2위를 했지만 승리기여도는 할러데이가 더 좋았다.

할러데이는 2010년 리그 챔피언십시리즈 팀 린스컴(샌프란시스코)과 두 번의 맞대결에서 1승1패를 했다. 그리고 필라델피아는 샌프란시스코에게 패했다. 2011년 디비전시리즈의 상대는 세인트루이스였다. 할러데이는 1차전 승리투수가 됐다. 시리즈는 5차전 최종전까지 이어졌고 할러데이가 다시 나섰다.

 

5차전의 상대는 운명적이게도 절친 크리스 카펜터였다. 할러데이는 시작하자마자 1번 라파엘 퍼칼에게 3루타, 2번 스킵 슈마커에게 2루타를 맞고 한 점을 내줬다. 하지만 경기가 끝날 때까지 더 이상 실점하지 않았다. 문제는 카펜터가 실점 없이 경기를 끝냈다는 것. 1회초에 한 점을 낸 세인트루이스가 1-0으로 승리함으로써 카펜터는 9이닝 무실점 완투승, 할러데이는 8이닝 1실점 완투패가 됐다. 이것이 할러데이의 마지막 포스트시즌 등판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전설이 되다

 

할러데이는 2012년 35세 시즌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2013년 13경기에서 4승5패 6.82에 그치고 2000년 이후 최악의 성적을 낸 할러데이는 16년의 선수 생활을 마감하기로 했다. 2013년 9월24일 마지막 경기에서 세 타자를 상대하고 내려온 36살의 할러데이는 토론토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4년 후인 2017년 11월8일. 믿을 수 없는 소식이 세상에 전해졌다. 할러데이가 조종하던 비행기 추락했고 할러데이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 1977년 5월15일 생으로서 아직 명예의 전당 피선거권(은퇴 후 5년)도 생기지 않은 할러데이는 마흔 살이었다.

 

비행기 조종사였던 아버지를 동경하면서 자란 할러데이의 또 다른 꿈은 비행기 조종사였다. 할러데이는 부인의 결사 반대를 무릅쓰고 비행기를 구입했다. 할러데이가 40년 중 31년을 함께한 부인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할러데이는 9살, 부인은 12살이었다.

 

이후 충격적인 사실이 더해졌다. 할러데이에게서 치료 목적을 크게 넘어서는 암페타민 모르핀 항우울제 성분이 발견된 것. 추락 직전 할러데이가 위태로운 곡예 비행을 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2019년 할러데이는 첫 해 투표에서 85.4%를 얻어 명예의 전당 입성 기준인 75%를 넘었다. 그러나 할러데이는 이 세상에 없었다. 할러데이가 새겨진 동판을 대신 들고 눈물을 쏟은 할러데이의 부인은 "토론토 선수로서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것"이라고 했던 할러데이의 생전 약속과 달리 할러데이의 모자에 아무 것도 새기지 말아달라고 했다.

 

완투가 사라진 시대. 할러데이는 어떻게 나홀로 완투 머신이 될 수 있었을까. 할러데이의 목표는 효율성의 극대화였다. 아웃을 잡아내는 데 들어가는 투구수를 최소화해 최대한 많은 이닝을 던지는 것이 할러데이의 목표였다. 할러데이는 우타자 몸쪽 싱커와 좌타자 몸쪽 커터로 땅볼을 양산했다. 삼진이 필요한 순간에는 너클커브와 체인지업이 있었다.

 

할러데이는 지독한 연습벌레이자 훈련광이었다. 새벽 5시에 나와 훈련을 시작했다. 다른 선수들이 출근하는 낮 12시쯤에는 이미 훈련복을 한 번 갈아 입은 상태였다. 하지만 경기에 대한 지나친 몰입 그리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는 결국 할러데이의 생명을 갉아먹었다.

 

할러데이는 완투의 상징이었다. 할러데이는 2003년부터 2011년까지 9년 동안 선발 등판의 23%에 해당되는 61번의 완투를 했다. 같은 기간 2위는 31번의 완투를 한 CC 사바시아였다. 그리고 이제 완투는 백악기 공룡처럼 멸종했다.

 

윌 스미스 주연의 2007년 영화와 결말이 전혀 다른 1954년 원작 소설 <나는 전설이다>에서 주인공 로버트 네빌은 핵전쟁 이후 퍼진 변종 바이러스로 인해 흡혈귀로 가득찬 세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닥치는대로 달려드는 '이성이 없는 흡혈귀' 외에도 변종 바이러스와 타협점을 찾은 '이성을 가진 흡혈귀'들이 사회를 구성해 나가며 인류를 대체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나는' 그들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문득 '나야말로' 비정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이란 다수의 개념이자 다수를 위한 개념이다. 단 하나의 존재를 위한 개념이 될 수는 없다.

 

이와 같은 독백을 통해 자신이 구세대 인류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것을 자각한 네빌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나는, 전설이다(I am legend).

 

7이닝 만 던져도 에이스가 될 수 있는 시대. 마지막까지 생존했던 완투형 에이스. 로이 할러데이.

 

그는, 전설이 됐다.

 

기사제공 김형준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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