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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현진의 등번호(01.03)- 전문가 칼럼

야구상식

by jungguard 2020. 1. 3.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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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현진 등번호 99번

 

토론토에 공식 입단한 류현진이 등번호 99번을 계속 달고 뛴다. 등번호 99번은 류현진이 KBO리그 한화 이글스 시절부터 사용하면서 자신을 상징하는 숫자가 됐다.

 

류현진이 처음부터 99번은 아니었다. 프로에서 류현진의 첫 등번호는 15번이었다. 팀 선배이자 롤모델인 구대성의 번호였다. 그런데 2005년 뉴욕 메츠에서 활약했던 구대성이 국내로 복귀하면서 15번을 내주고 99번을 달았다. 류현진은 한 방송에서 99번을 택한 이유로 "어중간한 두 자리 숫자보다는 마지막 두 자리 숫자를 택했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한화의 마지막 우승이 1999년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음을 덧붙였다.

 

2013년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류현진은 등번호 99번을 그대로 달았다. 다행히 다저스에서 99번은 경쟁이 치열하지 않은 번호였다. 류현진 이전 다저스의 99번은 매니 라미레스 뿐이었다.

 

2008년 다저스로 트레이드 된 라미레스는 클리블랜드와 보스턴에서 24번을 입었다. 윌리 메이스, 토니 페레스, 리키 헨더슨, 켄 그리피 주니어, 배리 본즈(피츠버그) 등이 애용한 24번은 강타자들을 지칭했다. 하지만 다저스에서 24번은 이미 영구결번이 된 상태였다. 팀 역대 6번의 월드시리즈 우승 중 4번을 이끈 월터 앨스턴 감독이 주인이었다. 라미레스는 24번이 안된다면 34번을 요청했는데, 다저스는 이 부탁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다저스의 34번은 공란이었지만, 웬만해선 내줄수도 없는 번호였다. 마음 속에 묻은 페르난도 발렌수엘라가 썼기 때문이다.

 

이후 다저스는 2012년 데려온 또 다른 라미레스에게 99번을 넘겨주려고 했다는 소문이 전해진다. 매니 라미레스 유니폼 재고가 너무 많이 남자 핸리 라미레스에게 권했다는 농담 아닌 농담이 있다(스탠 카스텐 회장은 한 술 더 떠 아라미레스 라미레스도 후보였다고 말했다). 플로리다/마이애미에서 달았던 2번이 토미 라소다의 영구결번이었던 라미레스는 다저스가 추천한 99번 대신 13번을 선택했다. 만약 이때 라미레스가 99번을 받았다면 류현진의 메이저리그 등번호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뉴욕 양키스는 영구결번이 가장 많은 팀이다. 2017년 데릭 지터의 2번이 영구결번으로 지정되면서 사용할 수 없는 등번호가 21개까지 늘어났다. 두 번째로 많은 세인트루이스가 12개인 것을 감안하면 그 차이를 더 실감할 수 있다.

 

영구결번 최다 구단

 

21: 양키스

 

12: 세인트루이스

 

11: 화이트삭스

 

10: 신시내티 보스턴 브레이브스 다저스 자이언츠

 

양키스는 지터의 2번이 빠지면서 한 자릿수 등번호가 모두 영구결번이 됐다(올해 애덤 오타비노가 팀 최초로 0번을 달긴 했다). 타순대로 등번호를 부여했던 과거에는 타자들이 한 자릿수 등번호를 독차지했다. 3번 베이브 루스, 4번 루 게릭, 5번 조 디마지오는 양키스가 자랑스러워하는 등번호이자 팀의 역사다. 특히 희귀병으로 세상을 떠난 게릭은 역사상 최초의 영구결번 지정자다.

 

양키스 한 자릿수 등번호 영구결번

 

1 : 빌리 마틴 *감독

 

2 : 데릭 지터

 

3 : 베이브 루스

 

4 : 루 게릭

 

5 : 조 디마지오

 

6 : 조 토레 *감독

 

7 : 미키 맨틀

 

8 : 빌 디키 & 요기 베라

 

9 : 로저 매리스

 

흥미롭게도 양키스의 8번은 두 명이 공유하고 있다. 먼저 8번을 알린 선수는 빌 디키였다. 1930년대 양키스 살인 타선의 멤버였던 디키는 훗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전설적인 포수다. 그런데 양키스는 디키의 8번을 묶어두지 않고 그가 은퇴한 지 2년이 지나자 다른 신인급 포수에게 8번을 넘겨줬다. 수많은 명언을 남긴 언어의 연금술사 요기 베라였다. 당연히 양키스는 1972년 베라의 8번을 영구결번으로 두려고 했다. 하지만 디키 역시 양키스가 외면할 수 없는 선수였다. 결국 양키스는 디키와 베라를 모두 인정하기로 결정. 이로 인해 양키스는 영구결번 '선수'21명이 아닌 22명이다.

 

양키스가 등번호를 수용한 것은 1929년이다. 이전까지는 등번호라는 개념 자체가 스포츠에서 생소하고 어색했다. 1928년 영국 프리미어리그 아스날과 셰필드 선수들이 등번호를 달기 시작하면서 인식이 바뀌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골키퍼가 1번을 입는 축구 또한 포지션에 따라 등번호가 정해진다.

 

19291월에 이 계획을 공식적으로 발표한 양키스는 등번호를 붙인 첫 번째 팀이 되는 듯 했다. 그러나 클리블랜드도 양키스에 이어 등번호를 새기겠다고 나섰다. 양키스는 1929년 개막전이 우천 지연됐는데, 이에 클리블랜드가 먼저 등번호 유니폼을 입고 나왔다. 생각은 늦었지만 실천은 더 빨랐던 것이다.

 

사실 클리블랜드도 할 말은 있다. 유니폼에 번호를 부착한 시초가 바로 클리블랜드이기 때문이다. 클리블랜드는 1916년 소매 위에 선수 고유 번호를 표시했다. 경기장에서 선수를 식별하기 위한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파격적인 실험은 주변 시선을 바꾸지 못하고 이내 종료됐다.

 

1923'혁신가' 브랜치 리키도 당시 이끌던 세인트루이스에 유니폼 번호를 넣었다가 금방 철회한 바 있다(리키는 다저스에서 재키 로빈슨을 영입해 인종 장벽을 허문 인물이다). 리키에 의하면 선수들이 번호가 있는 유니폼을 부담스러워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숫자가 있는 유니폼은 선망보다 놀림의 대상이었다. 관중들을 비롯해 상대 선수들에게도 비웃음을 사자 선수들은 견디지를 못했다. 경기 외적인 부분에서 스트레스를 받은 선수들이 좋은 경기력을 선보였을 리 없다.

 

이러한 과도기를 거쳐 양키스와 클리블랜드가 되살린 등번호 문화는 점점 메이저리그에 자리를 잡았다. 선수들도 등번호를 자신을 드러내는 또 다른 개성으로 여겼다.

 

여기서 특기할만한 점은 투수들의 등번호다. 앞서 언급한대로 타자들이 한 자릿수 등번호를 가져가면서 투수가 한 자릿수 등번호를 쓰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시대를 지배한 투수들만 살펴봐도 한 자릿수 등번호는 찾기 힘들다. 그렉 매덕스(31) 스티브 칼튼, 샌디 코팩스(32) 놀란 라이언(34) 톰 시버(41) 페드로 마르티네스(45) 랜디 존슨(51) 등은 모두 두 자릿수 등번호다.

 

역사상 한 자릿수 등번호를 달고 올스타전에 나간 투수는 단 한 명이다. 2018년 아메리칸리그 올스타 투수이자 그 해 사이영상을 수상한 블레이크 스넬이다.

 

생일이 124일인 스넬은 어렸을 때부터 숫자 4를 가장 좋아했다. 아마추어 때도 늘 4번을 고수했는데, 프로에서 투수가 4번을 쓰는 일은 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마이너리그에서 41, 11, 24번을 썼던 스넬은 첫 스프링캠프에서 50번을 받았다. 이 번호가 끔찍이도 싫었지만, 신인이 무턱대고 규율을 깰 수는 없었다. 스넬은 선배 맷 무어에게 4번을 달 수 없는지 조심스레 물었는데, 무어가 "편한대로 하라"는 답을 해줬다고 전해진다(ESPN).

 

스넬은 한 자릿수 등번호를 쓰는 이례적인 투수다. 현재 스넬 외에 한 자릿수 등번호를 달고 있는 선발투수는 마커스 스트로먼(6) 마르코 곤살레스(7) 마이크 리크(8) 정도다(토론토에서 6번이었던 스트로먼은 메츠에서 제프 맥닐이 6번을 쓰고 있자 7번으로 변경했다). 2017년 스넬과 스트로먼은 각각 4번과 6번을 달고 맞붙은 적이 있는데, 이는 76년만에 성사된 한 자릿수 등번호 투수간 선발 맞대결이었다.

 

선수들이 등번호를 정하는 이유는 각양각색이다. 스넬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숫자를 택하는 선수도 있고, 동경하는 선수가 달았던 번호를 이어가는 경우도 있다(지터를 우상으로 삼았던 트로이 툴로위츠키와 잰더 보가츠가 2번을 달았다). 반면 별다른 목적없이 첫 스프링캠프에서 받았던 번호를 그대로 쓰는 선수도 있다. 양키스 99번 애런 저지가 여기에 해당한다.

 

한편 캐나다에서 99번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아이스하키 영웅 웨인 그레츠키가 99번의 품격을 높였다. 류현진은 토론토가 처음으로 99번을 준 선수다. 99번을 향한 자부심이 달라지지 않기를 기대해 본다.

 

 

 

ESPN/스포팅뉴스/mlb.com/Uni Watch 등 참조

 

기사제공 이창섭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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