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드센스
사인 훔치기 스캔들로 얼룩진 휴스턴이 새로운 감독을 찾았다. 휴스턴은 팀 역대 19번째 감독으로 더스티 베이커(사진)를 임명했다.
1962년에 창단한 휴스턴은 팀 역사상 가장 암울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1월 중순 사무국은 사인 훔치기에 대한 처벌로 제프 르나우 단장과 A J 힌치 감독에게 1년 직무 정지 징계를 내렸다. 그러나 짐 크레인 구단주는 마치 징계를 예상이라도 한 듯 르나우와 힌치를 즉각 해고하고 분위기 쇄신에 나섰다.
갑자기 책임자 두 명을 잃은 휴스턴은 재빨리 다음 지휘관을 물색했다. 벤치코치 조 에스파다를 비롯해 감독 경력이 있는 벅 쇼월터, 존 기븐스, 브래드 아스머스 등이 후보군으로 떠올랐다. 부족한 시간에도 9명과 인터뷰를 가진 휴스턴은 이가운데 가장 화려한 커리어를 자랑하는 베이커를 선임했다. 양측은 일단 1년 계약에 합의. 휴스턴은 올 시즌 결과에 따라 내년에도 베이커를 끌고갈 수 있다(2021년 팀 옵션).
이로써 베이커(70)는 에인절스 조 매든(65)을 제치고 현역 최고령 감독이 됐다. 베이커보다 더 늦은 나이에 감독직을 수락한 인물은 1962년 케이시 스텡걸(71세)과 2011년 잭 매키언(80세)이 전부다. 1993년 1997년 2000년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한 베이커는 통산 3500경기를 모두 내셔널리그 감독으로 치렀다. 아메리칸리그가 창설된 1901년 이래 아메리칸리그 경기 없이 내셔널리그 경기를 가장 많이 소화한 감독이다.
1968년에 데뷔한 베이커는 애틀랜타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부모님은 베이커가 대학에 진학하길 바랐지만, 스카우트 빌 화이트의 끈질긴 집념이 마음을 돌렸다. 참고로 화이트는 베이커에 앞서 명예의 전당 2루수 조 모건을 발견했는데, 모건의 영입을 추천한 팀이 바로 휴스턴이었다(베이커가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먼저 상대한 팀도 9월8일 휴스턴이었다).
18살 때 프로에 온 베이커는 좋은 선배들을 만났다. 한 선배는 베이커의 어머니를 만나 "아들처럼 잘 돌볼테니 너무 걱정하지마시라"는 말을 했다. 실제로 그는 베이커를 아끼고 보살폈다. 베이커가 메이저리그에 적응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베이커 역시 멘토처럼 따른 이 선수는 1974년 4월9일 다저스전에서 베이브 루스의 최다홈런 기록을 깨뜨렸다. 애틀랜타 4번타자 행크 애런(사진)이었다. 이 경기에서 5번타자로 출장했던 베이커는 대기 타석에서 애런의 대기록을 지켜봤다.
아버지는 윌리 메이스를 응원했지만, 베이커는 LA 다저스 팬으로 자랐다. 등번호 12번을 달았던 이유도 1959-66년 다저스의 12번 토미 데이비스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베이커는 운명의 장난처럼 1975년 11월 다저스로 트레이드 됐다. 다저스는 선수 4명을 애틀랜타로 보냈는데, 이 중 한 명은 제리 로이스터다.
어린 시절 동경하던 팀에 온 베이커는 펄펄 날았다. 1977년 30홈런을 때려낸 데 이어 1980년에는 153경기에서 .294 .339 .503를 기록하고 MVP 4위에 올랐다. 1981-82년에는 올스타에 선정. 특히 골드글러브 실버슬러거를 모두 따낸 1981년에는 월드시리즈 우승 감격까지 누렸다. 선수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베이커는 지도자 생활을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했다. 다저스를 떠난 1984년 샌프란시스코와 계약을 했지만, 이듬해 오클랜드로 트레이드 되면서 단 한 시즌만을 뛰었던 팀이다. 그런데 1988년 샌프란시스코 1루코치로 지도자 인생의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 베이커가 그토록 좋아했던 다저스를 뒤로하고 라이벌 팀으로 넘어간 이유는 무엇일까. 그 배경에는 다저스 단장 알 캄파니스의 인종차별 발언이 있었다.
1987년 캄파니스는 한 TV 프로그램에서 흑인 감독이 적고, 흑인 단장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상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흑인들이 종종 수영을 하지 못하는 것도 그들에게 부력이 없어서"라고 덧붙였다(심지어 이 프로그램은 재키 로빈슨의 데뷔 40주년 특집이었다). 캄파니스의 망언은 일파만파로 퍼졌다. 베이커를 비롯해 행크 애런, 조 모건, 프랭크 로빈슨 같은 흑인 선수들이 집회 현장에 모였다. 이 광경을 지켜본 샌프란시스코가 베이커에게 접근했다. 샌프란시스코는 베이커에게 코치직을 제안했다. 당초 베이커는 단장 보좌직을 바랐지만, 샌프란시스코는 베이커가 현장에 더 어울리는 인물이라고 판단했다.
1루코치로 출발한 베이커는 이듬해 타격코치를 역임한 뒤 1993년 감독 자리에 올랐다. 1992년 72승90패에 그쳤던 샌프란시스코는 베이커가 지휘한 첫 해 103승59패로 성적이 크게 뛰어올랐다. '매직'으로 불린 베이커의 첫 번째 마술이었다.
베이커는 샌프란시스코 감독으로 지낸 10년간 3번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끌었다. 도합 840승은 존 맥그로(2583승) 브루스 보치(1052승)에 이은 자이언츠 역대 3위 기록. 베이커의 최대 강점은 선수단 통솔력으로, 배리 본즈와 제프 켄트가 서로 으르렁거리는 와중에도 팀을 정비했다는 측면에서 호평을 받았다.
이후 시카고 컵스(2003-06년) 신시내티(2008-13년) 워싱턴(2016-17년)을 거친 베이커는 선수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감독이 됐다. 인종차별 시대를 살아온 베이커는 항상 선수들을 먼저 배려했다(친정팀 애틀랜타는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지역이다). 어떠한 잣대로 선수들을 구분하지 않았고, 모든 선수들을 포용하려고 노력했다. 2013년 신시내티에서 함께 했던 추신수는 자신의 일기를 통해 수 차례 베이커를 따뜻한 감독이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워싱턴의 월드시리즈 우승에 기여한 하위 켄드릭도 베이커를 은인으로 꼽았다. 베이커는 최고의 감독이자 최고의 스승이었다.
하지만 베이커에게 늘 찬사만 따랐던 것은 아니다. 베이커는 컵스 시절 케리 우드와 마크 프라이어 같은 젊은 투수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 투구 수 관리에 소홀했던 베이커는 혹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여기에 포스트시즌에서 거듭 실패함에 따라 '정규시즌용 감독'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유일하게 월드시리즈에 진출한 2002년에도 6차전 5-0 리드를 지키지 못해 우승 문턱에서 쓰러졌다. 매번 투수 교체 타이밍을 놓치는 것이 문제였는데, 이로 인해 올드스쿨 감독들의 한계가 지적됐다.
베이커의 포스트시즌 결과
1997년 : DS 패배 (0승3패)
2000년 : DS 패배 (1승3패)
2002년 : WS 패배 (3승4패)
2003년 : CS 패배 (3승4패)
2010년 : DS 패배 (0승3패)
2012년 : DS 패배 (2승3패)
2016년 : DS 패배 (2승3패)
2017년 : DS 패배 (2승3패)
*PS 승률 0.418 (23승32패)
휴스턴과 상충되는 부분도 바로 이 점이다. 휴스턴은 최신식 분석 시스템을 받아들인 대표적인 팀이다. 전임 힌치도 뉴스쿨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현장 감각보다 프런트의 통계를 믿는 팀이다. 아직 단장이 정해지지 않았지만, 감독보다 단장을 기반으로 하는 야구를 펼칠 것이다. 3년 연속 정규시즌 100승, 같은 기간 두 번의 월드시리즈 진출이라는 결과를 냈기 때문에 이러한 야구를 포기할 가능성은 적다.
그렇다면 베이커는 휴스턴이 원하는 감독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아무리 숫자를 적극적으로 참고한다고 해도 수십년 동안 추구한 야구관이 쉽게 바뀌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한편 언제나 공정성을 강조했던 베이커는 시즌 내내 사인 훔치기와 관련된 의견을 밝혀야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는 생각보다 곤혹스러울 수 있다.
휴스턴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바라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반면 마지막 목표를 "월드시리즈 우승"이라고 내걸은 노장의 월드시리즈 우승은 바라는 사람이 꽤 있을 것이다. 짐 크레인 구단주는 영리한 혹은 영악한 결정을 내렸으며, 덕망이 높은 베이커 감독은 자신의 모든 명성을 걸고 마지막 도전에 나섰다.
기사제공 이창섭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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