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드센스
7월25일 뉴욕 양키스와 미네소타전. 9회초 선두타자 에드윈 엔카나시온은 데빈 스멜처의 공을 잡아당겨 좌중간 담장밖으로 보냈다. 엔카나시온의 시즌 30호 홈런이었다.
2012년 42홈런을 터뜨린 엔카나시온은 이 한 방으로 8년 연속 30홈런에 도달했다. 이 부문 최고 기록은 1998-2010년 알렉스 로드리게스(13년)지만, 엔카나시온의 8년 연속 30홈런은 29살부터 시작된 점에서 놀랍다. 즉 30대 시즌부터 7년 연속 30홈런을 때려낸 것. 30대 이후 엔카나시온보다 연속 30홈런 시즌이 길었던 타자는 배리 본즈(30~39세) 라파엘 팔메이로(30~38세) 마이크 슈미트(30~37세) 베이브 루스(31~38세)밖에 없다.
기념비적인 홈런을 날린 엔카나시온은 특유의 자세를 하고 베이스를 돌았다. 그리고 덕아웃에 들어가기 전 글레이버 토레스에게 선물 하나를 받았다. 앵무새 인형이었다. 엔카나시온은 자신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 마음에 들었다. 경기 후 보스턴 원정으로 가는 비행기 옆좌석에 앵무새를 두고 사진까지 찍었다. [SNS]
엔카나시온과 앵무새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언젠가부터 앵무새는 엔카나시온을 상징하는 징표가 됐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둘의 조합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엔카나시온은 현역 타자 중 만루홈런을 10개 이상 친 셋 중 한 명(앨버트 푸홀스, 로빈슨 카노). 2012년 4월29일 이와쿠마 히사시를 상대로 통산 4번째 만루홈런을 쏘아올렸다. 그때 비스듬히 베이스를 돌면서 자기도 모르게 한쪽 팔을 들어올린 것이 발단이 됐다. 동료들은 새롭게 선보인 홈런 세레모니를 무척 반겼는데, 정작 자신은 어떤 동작으로 베이스를 돌았는지 영상을 보고나서야 알았다고 한다(이 동작을 적극 권장한 호세 바티스타는 몸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라는 더 거창한 이유를 달았다).
엔카나시온의 독특한 동작은 금세 화제가 됐다. 그도 그럴 것이 엔카나시온이 홈런을 워낙 자주 때려냈다. 그래서 사람들의 시선을 자연스레 끌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 토론토를 응원하는 한 팬이 엔카나시온에게 날개를 아니, 앵무새를 달아줬다. <디애슬레틱>에 의하면 엔카나시온의 동작을 본 지역 방송 중계자가 "마치 앵무새를 붙들고 있는 해적을 보는 것 같다"고 말한 데서 착안했다. 실제로 앵무새를 합성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작업을 했고, 이 작업물이 널리 퍼지면서 유명해졌다.
당시 엔카나시온이 뛰었던 토론토는 오른쪽 어깨에 앵무새를 메고 달리는 엔카나시온을 엔터테인먼트 요소로 활용했다. 그렇지 않아도 즐길 거리가 부족한 메이저리그에 단비 같은 콘텐츠였다. 엔카나시온도 이 관심이 싫지 않았다. 엔카나시온은 "사실 어떻게 부르는지는 신경쓰지 않는다. 다만 홈런을 치고 나면 이 동작을 계속 고수할 것이다. 미신 같은 건 아니지만, 그냥 이 동작이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토론토에서 앵무새와 함께 높이 날아오른 엔카나시온은 2017년 클리블랜드와 3년 6000만 달러 계약을 맺었다. 클리블랜드 프로그레시브필드는 우타자에게 부담스러운 구장이지만, 엔카나시온은 홈런 공급을 멈추지 않았다. 특히 2017년 38홈런은 2000년 매니 라미레스(38홈런) 이후 클리블랜드 우타자 최다기록이었다. 2000년 라미레스는 28세 시즌, 엔카나시온은 34세 시즌이었다.
2012년 이후 엔카나시온 홈런 수
2012(29세) : 42홈런
2013(30세) : 36홈런
2014(31세) : 34홈런
2015(32세) : 39홈런
2016(33세) : 42홈런
2017(34세) : 38홈런
2018(35세) : 32홈런
2019(36세) : 34홈런
2018시즌이 끝나고 엔카나시온은 3각 트레이드에 포함되면서 시애틀로 이적했다. 시애틀 T-모바일파크(세이프코필드) 역시 우타자들의 무덤으로 알려진 곳. 그러나 T-모바일파크도 엔카나시온을 가로막지 못했다(30경기 .279 .380 .559 9홈런).
엔카나시온의 파워는 리빌딩 팀에 적합하지 않았다. 엔카나시온의 연봉 2000만 달러도 시애틀 입장에서는 사치였다(트레이드 과정에서 500만 달러를 받긴 했다). 애당초 시애틀의 목적이 트레이드 카드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시애틀은 일찌감치 6월에 엔카나시온을 양키스로 보냈다. 다시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로 돌아온 엔카나시온은 이적 두 번째 경기에서 홈런을 가동. 어색한 관계로 만난 6월26일 토론토전에서도 옛 정에 휩쓸리지 않고 가차없이 홈런을 날렸다.
하지만 엔카나시온은 8월 오른 손목 골절에 이어 9월 왼 사근 부상으로 상당 경기를 결장했다. 엔카나시온이 109경기 출장(.244 .344 .531)에 그친 것은 2010년 96경기 이후 처음. 양키스는 엔카나시온이 포스트시즌에서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하자(8경기 .161 .278 .258 0홈런) 엔카나시온의 2020년 팀 옵션(2000만)을 거절했다(홈런 생산은 엔카나시온 없이도 자신있었던 양키스는 포스트시즌 에이스 구하기에 전념한다).
지난해 엔카나시온을 방해한 장애물은 부상이었다. 2018-19년 삼진율이 이전에 비해 높아졌지만(22.1%) 여전히 걱정할 수준은 아니다. 평균 타구속도(90.0마일) 강한 타구 비중(42.0%) 배럴 타구 비중(12.6%)을 살펴보면 타구의 질이 나빠지지도 않았다.
엔카나시온 평균 타구속도 변화
2015 : 90.2마일
2016 : 90.8마일
2017 : 89.2마일
2018 : 89.9마일
2019 : 90.0마일
엔카나시온은 구종별 상대 타율에서 두드러진 하락이 있긴 했다. 포심 상대 타율이 2018년 0.269, 2019년 0.265에서 지난해 0.225로 떨어진 것. 포심 대처력이 나빠지는 건 대개 노쇠화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한 번 성적이 내려가면 회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최근 폴 골드슈미트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런데 엔카나시온은 구속 94마일 이하 포심 상대 타율이 0.192인 반면, 95마일 이상 포심 상대 타율은 0.310(42타수13안타)였다(장타율 94마일 이하 0.466→95마일 이상 0.667). 세월을 비켜가지 못한 타자들은 속도전에서 패배했는데, 엔카나시온은 아직 건재함을 과시한 것이다. 달리 말해 엔카나시온의 포심 대처력은 좀 더 지켜봐야 될 것으로 보인다.
뛰어난 운동 능력과 다재다능함이 높은 평가를 받는 최근 메이저리그는 한 방만 갖춘 홈런 타자가 외면받는 분위기다(홈런이 홍수처럼 쏟아지면서 가치가 떨어지기도 했다). 유망주들을 선호하는 상황에서 엔카나시온과 같은 베테랑 홈런 타자는 더욱 입지가 좁아졌다. 하지만 올해 '윈나우'를 외친 화이트삭스가 엔카나시온에게 1년 1200만 달러 계약을 안겨줬다(2021년 팀 옵션 1200만). 홈런으로 흥했던 지구 라이벌 미네소타를 붙잡기 위한 포석으로, 지난해 엔카나시온은 미네소타 홈구장 타겟필드에서 타격하는 것이 마음에 든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유례없는 60경기 시즌이 열리면서 엔카나시온의 연속 30홈런 시즌은 사실상 중단됐다. 8년 연속 30홈런에 자부심이 컸기에 아쉬움이 더 짙다. 통산 414홈런을 기록 중인 엔카나시온은 500홈런으로 가는 과정도 훨씬 험난해졌다(통계 전문가 댄 짐보스키는 엔카나시온의 500홈런 가능성을 47%에서 26%로 하향 조정했다).
훗날 우리는 엔카나시온은 어떤 타자로 기억할까. 2012년 이후 최다홈런 1위에 올라있지만, 사실 엔카나시온은 한 번도 홈런왕 타이틀을 가져본 적이 없다. 마치 MVP를 여러 번 탄 것 같은데, 실상은 MVP 시즌이 한 번도 없는 데릭 지터 느낌이다.
참고로 앵무새는 다른 동물보다 훨씬 긴 수명을 자랑한다. 평균 35년에서 50년이며, 세계 최고령 앵무새는 80살 넘게 살기도 했다. 상상 속의 앵무새를 태우고 여유롭게 베이스를 도는 홈런 타자의 커리어도 더 길게 이어지길 바라 본다.
2012년 이후 메이저리그 홈런 순위
297 : 에드윈 엔카나시온
295 : 넬슨 크루스
280 : 마이크 트라웃
252 : 지안카를로 스탠튼
251 : Chris 데이비스
기사제공 이창섭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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