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드센스
에드윈 도날드 '듀크' 스나이더(Edwin Donald 'Duke' Snider)
생년월일 : 1926년 9월 19일 ~ 2011년 2월 27일
국적 : 미국. 출신지 :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사망지 : 캘리포니아주 에스콘디도
포지션 : 중견수 투타 우투좌타
프로 입단면
소속팀 : 브루클린-로스앤젤레스 다저스(1947~1962) 뉴욕 메츠(1963)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1964)
명예의 전당 헌액자
헌액 연도 : 1980년
헌액 방식 : 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 86.49% (11회)
1950년대의 지배자
뉴욕의 외야를 삼분하던 중견수 중 한 명
다저스에서 말 그대로 한 시대(Decade)를 풍미한 강타자. 은여우(Silver fox), 플랫부시 공작(Duke of Flatbush)등의 별명으로 불리었다.
1926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와드 스나이더와 플로렌스 존슨 사이에 외동아들로 태어난 에드윈 도날드 스나이더는, 부모로부터 늘 자신감 있고 스마트하게 살라는 뜻으로 불과 다섯 살 때부터 '듀크'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 본래 오른손 잡이었던 듀크 스나이더는 세미 프로 야구 선수였던 아버지로부터 우투수를 상대로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끔 좌타 교육을 받았는데, 이는 신의 한 수가 되어 훗날 듀크 스나이더는 우투수를 상대로 어마어마한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이후 콤프턴 고등학교로 진학한 듀크 스나이더는 야구뿐만이 아니라 농구와 미식축구 등을 모조리 섭렵하며 주 내 최고의 유망주로 이름을 날렸고, 그런 그를 막 브루클린 다저스의 신임 단장으로 부임한 전설의 명단장, 브랜치 리키가 매의 눈으로 눈독을 들이다 1943년 정식으로 계약을 하게 된다. 당시 그의 계약금은 750달러였다. 만 16세의 어린 소년이 서부의 따뜻한 고향에서 차가운 동부의 대도시로 향하는 순간이었다.
1944년, 만 17세의 듀크 스나이더는 B리그에서 자신보다 평균 6, 7세는 많은 선수들을 상대로 타율. 294 홈런 9개의 훌륭한 성적을 거두고 잠시 더블 A 맛까지 보게 된다. 이후 듀크 스나이더는 징집되어 해군에서 18개월 동안 복무를 하게 됨으로 1945년 시즌을 통으로 날리고, 전역 후 다시 더블 A에서 타율. 250.250 홈런 5개로 영점을 조정한다. 듀크 스나이더를 다저스로 데려온 브랜치 리키는 그의 재능이 뛰어나다 여겼기에 이듬해 1947년, 재키 로빈슨이 역사적인 데뷔를 한 이틀 후 정식으로 브루클린 다저스에서 데뷔를 시켰다. 하지만 아직 만 20세에 불과했던 듀크 스나이더는 47, 48 시즌 통합 5 홈런 .243의 형편없는 성적을 거두고 메이저리그보다는 트리플 A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은 그의 재능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결국 19491949 시즌 듀크 스나이더는 에베츠 필드의 중견수 자리를 차지하며 23 홈런 92타점. 292의 성적을 거둔다. 이미 앞선 2년 동안 ROY의 자격은 잃었고, 삼진 또한 리그 1위(92개)에 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듀크 스나이더의 성적은 불과 만 22세의 애송 이치고는 대단히 훌륭한 것이었다.
하지만 1949년의 성적은, 앞으로 있을 10년의 대폭발을 위한 전초전에 불과했다.
1950년, 다저스의 주전 중견수 자리를 완전히 굳힌 듀크 스나이더는 그 해 31 홈런 107타점. 321. 379. 553. 을 시작으로 1950년대를 말 그대로 두들겨 팼는데, 그 10년 동안 그가 거둔 성적은 326 홈런 1031타점. 308. 390. 569에 달한다. 홈런왕(1956 시즌) 홈런왕(1956 시즌)과 타점왕(1955 시즌)에(1955 시즌) 오른 시즌은 각각 11 시즌에 불과했으나, 그는 꾸준한 성적을 거두었다. 홈런과 타점, 장타율은 1950년대 1위이며, 7 시즌 연속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5차례 월드시리즈로 팀을 이끌어 그 가운데 2차례 우승을 거두었다. 아쉽게도 MVP는 1955 시즌 2위가 가장 높은 성적이었으나 당시 MVP 로이 캄파넬라와는 투표 총점이 5점 차이에 불과했고, 모든 성적은 듀크 스나이더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대중들은 듀크 스나이더의 이름과, 다저스의 홈구장인 에베츠 필드가 위치한 뉴욕 브루클린 플랫부시 지역을 빗대 그를 플랫부시 공작이라 지칭할 정도였다.
당시 뉴욕에 위치했던 세 메이저리그 팀 뉴욕 양키스와 브루클린 다저스, 뉴욕 자이언츠는 각각 팀의 얼굴과 같은 중견수를 보유했는데 바로 미키 맨틀과 듀크 스나이더, 그리고 윌리 메이스였다. 이 셋은 모두 훗날 각 팀의 영구결번이 되고,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 되었는데 커리어 전체를 보면 단연 윌리 메이스가 우세하고, 그 인기는 뉴욕의 아이콘 미키 맨틀이 가장 앞섰으나 1950년대의 폭발력만큼은 듀크 스나이더가 우세했다고 볼 수 있었다. 이들의 인기는 대단하여 훗날 "Willie, Mickey and Duke"라는 합창 후렴이 나온 히트송까지 나왔다.
비록 로스앤젤레스가 듀크 스나이더에게는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었고, 1959년에는 1955년에 이어 두 번째 월드시리즈 제패를 이루었으나 듀크 스나이더는 제2의 고향과 같았던 브루클린을 사랑했고 뉴욕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었다. 로스앤젤레스로 연고지를 옮긴 이후 55 시즌 동안 듀크 스나이더는 부상과 부진이 겹치며 연평균 100게임에 출장하여 15 홈런 53타점. 292. 385. 523의, 이름값에 걸맞지 않은 성적을 남기고 만다.
1962 시즌. 다저스와 자이언츠가 뉴욕에서 야반도주 한 이후 새롭게 창단한 신생팀이었다. 메츠의 연고지는 과거 다저스와 자이언츠 연고였던 맨해튼-브루클린-퀸스였고, 뉴욕의 팬들은 돌아온 플랫부시 공작을 환영했다. 그러나 뉴욕 메츠가 사용하던 홈구장인 폴로 그라운드는 과거 듀크 스나이더의 홈구장이었던 에베츠 필드와 달리 악명 높은 투수 구장이었고, 결국 듀크 스나이더는 그 해 14 홈런 45타점. 243. 345. 40145타점. 243. 345. 401에 그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욕의 팬들은 돌아온 영웅을 환영하는 의미에서 그를 통산 여덟 번째 올스타로 뽑아주었고, 그에 보답하듯 듀크 스나이더는 메츠에서 통산 2000안타와 400 홈런을 기록하게 되었다.
1964 시즌. 뉴욕으로 돌아온 지 11년 만에 다시 서부로 되팔려간, 그것도 최악의 라이벌 구단으로 팔려간 듀크 스나이더는 완전히 의욕을 잃고, 그 해 44 홈런 17타점. 210. 302. 32317타점. 210. 302. 323의 초라한 성적을 거둔 뒤 유니폼을 벗고 만다.
듀크 스나이더는 다저스에 있던 시절 캘리포니아 주 폴 브룩이라는 곳에 60 에이커에 달하는 아보카도 농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훗날 노후를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은퇴 후 볼링장 사업이 실패하여 아보카도 농장을 말아먹은 듀크 스나이더는 결국 1968년 다저스 산하 마이너리그의 스카우터, 감독 등의 일을 하고, 이듬해인 1969년부터 1971년까지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중계방송의 해설자를 하다 1973년 몬트리올 엑스포스의 라디오 분석가 겸 방송 아나운서 일을 시작했다. 13년간 듀크 스나이더는 매우 부드럽고 차분한 말투로 많은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1980년, 부족한 누적 성적과 8회의 올스타 외에 전무한 수상 실적 탓에 1111수 만에 간신히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된 듀크 스나이더는, 헌액과 동시에 자신의 등번호 4번이 다저스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되는 영광을 함께 누린다. 이후 1987년 심장 마비와 다리 부상 등으로 인해 취미로 즐기던 골프를 그만두게 되었고, 1995년에는 과거 소득세 기피로 인해 기소를 당하기까지 한다. 벌금과 이자로 약 5만 7천 달러를 납부한 듀크 스나이더는 이후 2년간 보호 관찰 신세로 전락하고, 2011년 병원에서 지병으로 인해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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