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드센스
샌포드 "샌디" 코팩스(Sanford "Sandy" Koufax)
생년월일 : 1935년 12월 30일 (83세)
국적 : 미국. 출신지 : 뉴욕주 브루클린
신체 : 188cm, 95kg 포지션 : 투수. 투타 : 좌투우타
프로 입단 : 1955년 자유계약 (BKN)
소속 구단 : 브루클린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55~1966)
수상
7 × All-Star (1961~1962, 1963~1966)
4 × World Series champion (1955, 1959, 1963, 1965)
NL MVP (1963)
3 × Cy Young Award (1963, 1965, 1966)
2 × World Series MVP (1963, 1965)
3 × MLB wins leader (1963, 1965, 1966)
5 × NL ERA leader (1962~1966)
4 × MLB strikeout leader (1961, 1963, 1965, 1966)
기록
3 × Triple Crown (1963, 1965, 1966)
Pitched a perfect game (1965.09.09)
Pitched four no-hitters
미국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활약한 전설적인 좌완 투수이자,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전성기를 보낸 투수를 꼽을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투수이자, 역대 최고의 좌완 투수 논쟁에서 항상 거론되는 선수
통산 성적은 1212 시즌 동안 165승 87패, 2.76 ERA, 2324.1이닝, 2396K, K/9 9.27, BB/9 3.16, K/BB 2.93, HR/9 0.789를 기록했다.
샌디 코팩스는 1935년 12월 30일 뉴욕 브루클린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원래 어머니 에블린(Evelyn, 결혼 전 성은 리히텐슈타인―Lichtenstein)과 아버지 잭 브라운(Jack Braun) 사이에서 샌포드 브라운(Sanford Braun)이란 이름으로 태어났는데, 세 살 당시 부모가 이혼했고, 아홉 살 무렵 어머니가 새아버지 어빙 코팩스(Irving Koufax)와 재혼하면서 그 슬하에서 지금 야구를 시작한 것은 1951년 15세 시절이었다고 한다. 처음엔 좌완 포수로 시작했고, 이후 1루수로 자리를 옮겨 활동했다. 본격적으로 투수를 시작한 건 재학 중이던 라파예트 고등학교의 야구팀 코치 밀트 로우리(Milt Laurie)가 투수를 해볼 것을 제안하면서부터였다. 사실 고교 시절만 하더라도 코팩스에게 있어 야구는 그저 겸사로 하는 스포츠에 불과했고 오히려 농구 선수로서 더 유명했다.
하지만 신시내티 대학교(University of Cincinnati)에 진학한 이후론 농구 선수로서보다 야구 선수로서 더 큰 관심을 받았다. 제구력은 부족했지만 엄청난 구위[2]를 가진 좌완 투수였던 코팩스는 프로팀 스카우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그 결과 브루클린 다저스에서 제시한 연봉 6,000달러, 계약금 14,000달러란 특급 대우에 합의하며 프로 야구 선수로서의 첫 발을 내딛게 됐다. 의.
1955년~1960년 시즌 : 미완의 대기
계약금이 4,000달러를 넘었던 코팩스는 당시 규정에 의해 2년 동안 마이너 리그로 내려갈 수 없었고, 이 탓에 낮은 레벨에서부터 체계적으로 투구를 배울 기회를 갖지 못한 채 메이저 경력을 시작해야만 했다. [3]. 여담으로 당시 다저스가 로스터에 코팩스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 마이너로 내려보낸 투수는 바로 훗날 감독으로서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되는 다저스의 명장 토미 라소다였다.
데뷔전은 1955년 6월 24일에 있었다. 그 날 밀워키 브레이브스를 상대로 메이저 리그 첫 등판을 가져 2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 그리고 동년 8월 27일 신시내티 레즈를 상대로 2피안타 1414 탈삼진 완봉승을 기록하며 메이저 리그 첫 승을 신고했다. 하지만 뛰어난 구위에도 불구하고 해당 시즌 41과 2/3이닝 동안 볼넷을 28개나 허용했을 정도로 불안정한 제구력을 보였다. 이로 인해 이닝에서 알 수 있듯 중용되지 못했고, 소속팀 다저스가 그 해 월드 시리즈 챔피언에 등극했음에도 코팩스는 시리즈 내내 단 한 차례도 등판할 수 없었다.
2년차 시즌인 19561956 시즌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뛰어난 구위를 제대로 활용할 제구력을 갖추지 못하며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당시 감독이었던 월터 알스튼(Walter Alston)은 그런 코팩스를 신뢰할 수 없었고, 코팩스는 시즌 동안 58과 2/32/3이닝 만을 소화하는데 그쳤다. 그 해 자신의 마지막 시즌을 치르던 재키 로빈슨은 당시 알스튼 감독과 이런저런 이유로 자주 다퉜다고 하는데, 그중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코팩스에게 많은 기회를 주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도 있었다고 한다.
1957 시즌을. 그 경험 덕분인지 해당 시즌 코팩스는 9이닝 당 10개 이상의 삼진을 잡아내며 구위를 결과로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제구력 개선이란 숙제는 여전했던 터라 선발 로테이션에 진입할 수 없었다. 9월 29일 시즌 최종전에 마지막 투수로 등판함으로써 로스앤젤레스로 이동하기 전 브루클린 다저스 소속으로 공을 던진 마지막 투수가 되기도 했다.
1958 시즌은. 탈삼진율도 다시 예전 수준으로 떨어졌으며 해당 시즌 내셔널 리그 최다 폭투를 기록했을 정도로 불안정한 투구를 했다.
1959 시즌엔. 1959년 8월 31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상대로 등판한 경기에선 탈삼진을 무려 18개나 잡아냈는데, 이는 내셔널 리그 신기록이자, 밥 펠러의 메이저 리그 기록과 동률이었다. 그러나 항상 그래 왔던 데로 불안정한 제구력은 한결같았고, 여전히 자신의 포텐셜을 완전히 발휘할 수 없었다.
오프시즌 중엔 다저스의 단장 버지 버베이시(Buzzie Bavasi)에게 트레이드를 요청하기도 했다. 당시 자신이 충분한 기회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실제 트레이드가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1960 시즌 역시 제구력 불안과 그로 인한 감독의 불신이 반복됐다. 이에 코팩스는 당시 야구를 그만둘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을 정도로 실망했다고 한다.
1962년~1966 시즌전성기
1961 시즌을, 코팩스는 한 번 더 도전해보기로 결심했다. 절치부심하는 마음으로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훈련에 매진했고, 그 어떤 때보다 뛰어난 컨디션으로 시즌에 임했다고 한다. 스프링캠프 기간 다저스 스카우트 케니 마이어스(Kenny Myers)의 지적을 통해 투구 동작을 개선하는 일이 있었고, 올랜도 소재의 B팀 연습 경기에서 제구 난조를 보였을 때, 조금 힘을 빼고 던져보라는 포수 놈 셔리(Norm Sherry)의 조언이 계기가 되어 투구 감각을 잡아내는 일도 있었다. 뭔가 다를 것만 같았던 그 시즌은 실제로 달랐다. 코팩스의 제구력은 장족의 발전을 이뤘고, 덕분에 본격적으로 선발진에 합류해 빼어난 성적을 낼 수 있었다. 시즌 동안 기록한 탈삼진은 무려 269개로, 이는 크리스티 매튜슨의 58년 된 내셔널 리그 기록 267개를 깨는 새로운 기록이었다.
1962 시즌은, 투수 친화적인 다저 스타디움으로 홈구장을 옮긴 첫 시즌이었다. 해당 시즌 코팩스는 지난해 달라진 모습에서 더욱 발전하여 타자들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6월 30일 뉴욕 메츠를 상대로 커리어 최초의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는 등 무서울 게 없던 코팩스였지만 부상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시즌 초 4월에 얼 프랜시스(Earl Francis)를 상대로 타석에 들어섰다가 공을 던지는 왼손에 부상을 입었던 것이다. 당시 검지의 감각에 문제가 생겼지만 최초엔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어느 때보다 좋은 기량을 가지게 된 만큼 이를 중단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 그런 악재 속에서도 출장을 강행해 뛰어난 활약을 이어갔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7월 중순이 되자 결국 부상은 왼손 전체로 퍼졌고, 도저히 공을 던질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전문의에게 손바닥 동맥 부상을 진단받은 코팩스는 9월이 돼서야 다시 공을 던질 수 있었다. 그러나 부상의 후유증으로 인해 잘 던지긴커녕 제대로 이닝을 소화하기도 버거운 모습을 보였고, 결국 다저스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추격을 허용하며 플레이오프 승부 끝에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놓치고 말았다.
아쉬움이 남았던 시즌으로부터 이어지는 1963시즌, 그 해 메이저 리그는 스트라이크 존을 넓혔고, 이로 인해 본격적인 투고타저의 시대가 열렸다. 이런 환경에서 코팩스를 비롯한 메이저 리그의 에이스들은 이전보다 더욱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중에서도 코팩스의 활약은 단연 돋보였다. 동년 5월 11일엔 당대의 라이벌이었던 후안 마리 칼을 내세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상대로 커리어 두 번째 노히트 노런을 만들어냈다. 거칠 것 없던 코팩스는 그 해 25승, 1.88 ERA,그리고 306 탈삼진을 거두며 투수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고, 생애 최초의 사이 영 상이자 역대 최초의 만장일치 사이 영 상을 차지했다. 내셔널 리그 MVP 역시 그의 몫이었다.
그리고 그 해 코팩스의 활약은 페넌트레이스에서 그치지 않았다. 월드 시리즈에서 화이티 포드를 앞세운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 1차전에 등판해, 무려 15개의 탈삼진을 잡아내며 22 실점 완투승을 기록했는데, 15 탈삼진은 칼 어스킨(Carl Erskine)의 1414 탈삼진을 깨는 새로운 기록이었다. 커리어의 황혼기였지만, 뉴욕 양키스의 불세출의 리더이자 명언제조기였던 요기 베라는, 처음 코팩스를 만났을 때는 "저런 애송이에게 25승을 헌납한 내셔널 리그 타자들은 모두 바보냐?"라고 코팩스를 무시하는 인터뷰를 했지만 1차전의 괴물 피칭을 보고 난 후 "코팩스가 어떻게 25승을 했는지는 알겠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겠는 건 대체 어떻게 5번을 진 거냐는 거다."란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 경기를 포함 파죽의 3연승으로 시리즈 우승을 목전에 둔 다저스는 4차전에 다시 에이스 코팩스를 내보냈다. 그는 여기서 또 한 번 11 실점 완투승으로 양키스를 압도했고, 다저스는 4연승으로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시리즈 MVP는 코팩스였다.
1963년의 놀라운 활약으로 명실상부한 메이저 리그 최고 투수에 등극한 코팩스는 1964 시즌에도 명성에 걸맞은 투구를 했다. 하지만 그건 부상과의 처절한 사투를 거쳐 나온 결과물이었다. 그 해 4월 22일 왼쪽 팔꿈치에 통증을 느낀 코팩스는 시즌 중 코티즌 주사를 세 번이나 맞으며 투구를 이어갔다. 그런 상황에서도 6월 4일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상대로 세 번째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며 괴물 같은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19승을 거둔 등판의 다음날 아침, 왼팔을 제대로 펼 수 없을 정도로 부상이 심했지만 전날 경기의 결과는 13 탈삼진 완봉승이었다. 하지만 활약은 거기까지였다. 팀 닥터 로버트 컬랜(Robert Kerlan)은 코팩스에게 심각한 관절염을 진단했고, 에이스에게 제동이 걸린 다저스 역시 그 해 페넌트레이스 우승에 실패했다.
1965년 3월 31일 스프링캠프 경기를 소화한 코팩스는 그다음 날 아침 왼팔 전체가 검푸르게 된 것을 발견했다. 이에 팀 닥터는 코팩스에게 로테이션을 꼬박꼬박 소화할 수 있다면 다행일 것이고, 또 이대로 선수 생활을 강행한다면 일상생활에 영향을 끼칠 정도의 장애를 갖게 될 거란 이야기를 했다. 코팩스는 경기 외의 불필요한 투구 수를 최대한 줄였으며 온전히 경기를 소화하기 위해 시즌 내내 독한 진통제를 달고 살아야 했다. 그럼에도 필드 위에서는 부상을 참고 던지고 있단 걸 잊게 만들 정도로 완벽했다. 코팩스는 해당 시즌 동안 335 2/3이닝을 소화하며 또 한 번 팀을 페넌트레이스 우승으로 이끌었고, 두 번째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며 두 번째 만장일치 사이 영 상을 수상했다. 9월 9일엔 메이저 리그 역사상 8번째 퍼펙트게임이자 자신의 통산 네 번째 무안타 경기를 기록하는 위업을 이뤄냈다.
그리고 그 해 월드 시리즈에선 경기 전부터 전국적인 화제의 중심이 되는 일이 있었다. 유대교의 속죄일(Yom Kippur)과 등판일이 겹친다는 이유로 1차전 등판을 사양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개인의 신념과 사회적 지위가 충돌한 예로서 아직까지도 코팩스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일화로 남아있다. 훗날 코팩스 본인은 많은 이들에게 사회적인 메시지를 던질 의도는 없었고, 그저 존중에 관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어차피 당시 다저스에는 코팩스와 당대 최고를 넘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원투펀치를 구성한 돈 드라이스데일이 있던 만큼,, 코팩스가 2차전에 등판하는 것이 팀의 입장에서 아주 대수로운 일까진 아니었다. 그렇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편하게만 흘러가진 않았다. 1차전에 등판한 드라이스데일이 패퇴했고, 2차전에 나선 코팩스마저 6이닝 2 실점 패전을 기록했다. 그러나 다저스는 초반 열세에 무너지지 않고 침착하게 반격에 나섰고, 코팩스는 5차전과 7차전에 등판해 두 경기 연속 완봉승으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심지어 7차전은 이틀 휴식 후의 등판으로, 통증 탓에 커브볼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해 초반 이후엔 거의 패스트볼만으로 경기를 풀어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시리즈 MVP는 2년 전과 마찬가지로 코팩스의 몫이었다.
이후 오프시즌 동안엔 연봉 협상에서 구단과 마찰이 빚는 일이 있었는데, 이 탓에 스프링캠프 합류가 다소 늦어졌다. 그러나 성적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323이닝을 소화하며 27승 9패를 거뒀고, 평균자책점에서 커리어 하이인 1.73을1.73 기록하며 자신의 세 번째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 페넌트레이스 우승이 걸린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정규시즌 마지막 맞대결이 더블헤더로 치러졌는데, 그 두 번째 경기에 이틀 휴식하고 등판해 짐 버닝을 상대로 완투승을 기록했다. 당연하게도 해당 시즌 사이 영 상 또한 코팩스의 만장일치 수상이었다. 이어지는 볼티모어 오리올스와의 월드 시리즈에선 2차전에 선발 등판했다. 하지만 연이은 무리한 등판으로 인해 컨디션은 정상이 아니었고, 여기에 야수의 실책까지 겹치며 짐 파머의 완봉승을 지켜봐야 했다. 이날 경기에서 5차전 등판을 염두에 두고 6회까지만 던진 코팩스였지만, 그가 5차전에 등판하는 일은 없었다. 시리즈 내내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 다저스는 4연패로 우승에 실패했다. 그리고 1966년 11월 18일, 자신의 팔에 한계가 왔음을 느낀 코팩스는 30세의 나이로 은퇴를 발표, 팬들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자신의 선수 경력에 종지부를 찍었다.
<LA다저스 볼티모어 오리올스 원정2차전>
2019년 9월12일 LA다저스 볼티모어 오리올스 원정2차전
다저스(94승53패) 3-7 볼티모어(47승98패) W 암스트롱(1-1 5.26) L 퍼거슨(1-2 5.13)
LA다저스 레전드 - 재키 로빈슨<LA다저스 뉴욕메츠 원정1차전> (0) | 2019.09.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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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다저스 명예의 전당 헌액자 - 로이 캄파넬라<LA다저스 볼티모어 원정3차전> (0) | 2019.09.13 |
LA다저스 명예의 전당 헌액자 - 돈 서튼<LA다저스 볼티모어 원정1차전> (0) | 2019.09.11 |
LA다저스 명예의 전당 헌액자- 듀크 스나이더 (0) | 2019.09.10 |
LA다저스 명예의 전당 헌액자- 토미 라소다<LA다저스 SF 홈3차전> (0) | 2019.09.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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