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드센스
1년 전 브라이스 하퍼는 필라델피아와 오랜 줄다리기 끝에 13년 3억3000만 달러 계약을 맺었다. 연평균 금액은 2538만4615달러였지만, 총 규모에서 지안카를로 스탠튼(13년 3억2500만)을 넘어 역대 1위에 올랐다. 하퍼의 왕좌는 한 달이 채 가지 않았다(마이크 트라웃 12년 4억2650만).
하퍼는 애초부터 계약 기간을 중시했다. 남은 커리어 동안 자신에게 또 다른 팀이 없길 바랐다. 그래서 전 구단 트레이드 거부권을 넣은 대신 다시 FA 자격을 얻을 수 있는 옵트아웃 조항은 넣지 않았다.
하퍼는 투지가 넘치는 선수다. 간혹 자기중심적인 플레이로 오해를 받지만, 승리를 위해서라면 몸을 아끼지 않는다. 한편 필라델피아는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열광적인 팬들을 보유한 팀이다. 지나친 행동으로 선을 넘을 때도 있지만, 필라델피아 선수들에겐 든든한 아군이다. 역동적인 선수와 더 역동적인 팬들 간의 만남. 이 조합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가 사람들의 관심사였다.
이적 후 첫 안타가 홈런이었던 하퍼는 세 경기 연속 홈런을 터뜨렸다. 시즌 3호 홈런은 친정팀 워싱턴 내셔널스파크를 방문해 슈어저를 상대로 때려냈다(워싱턴 팬들은 하퍼에게 야유를 보냈다). 4월10일 필라델피아 팬들 앞에서 스트라스버그에게 투런홈런을 친 하퍼는 첫 20경기 OPS 0.991로 순항했다(.289 .426 .556).
문제는 하퍼가 필라델피아에서도 초반 기세를 이어가지 못한 것. 하퍼는 늘 화려하게 출발한 뒤 초반 스퍼트가 끝나면 급격하게 가라앉았다. 필라델피아에서도 이같은 버릇이 반복됐는데, 첫 20경기 후 21경기 OPS는 0.596로 처참했다(.143 .310 .286). 조급함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삼진 30개는 같은 구간 윌 마이어스, 조이 갈로, 넬슨 크루스(이상 29삼진)보다 많은 메이저리그 가장 나쁜 기록이었다.
감정 변화가 심한 필라델피아 팬들이 어떻게 대했는지는 안봐도 뻔한 일. 하퍼를 응원하는 목소리로 가득찼던 시티즌스뱅크파크는 거센 질타만이 쏟아졌다.
만약 이 과정에서 하퍼가 감정적으로 대응했다면 양측의 충돌은 심각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하퍼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하게 상황을 풀어나갔다. 자신이 관중석에 있었어도 실망했을 것이라며 자조적인 입장을 취했다. 구차한 변명은 하지 않고 팬들의 입장을 그대로 이해하려고 했다. 이는 하퍼가 진심으로 필라델피아를 자신의 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하퍼는 이대로 주저앉지 않았다. 전반기 부진을 딛고(90경기 .253 .370 .470) 후반기 들어 성적을 회복했다(67경기 .270 .376 .564). 주요 타격 지표에서 모두 팀 내 1위를 차지. 지난해 연봉이 1000만 달러였던 하퍼는 승리기여도(fWAR) 4.6을 기록하면서 연봉 대비 뛰어난 활약을 해냈다(하퍼는 올해부터 연봉 2600만 달러를 받는다).
2019 필라델피아 주요 타격 순위
홈런 : 하퍼(35) 호스킨스(29) 리얼뮤토(25)
타점 : 하퍼(114) 호스킨스(85) 리얼뮤토(83)
득점 : 하퍼(98) 리얼뮤토(92) 호스킨스(86)
도루 : 하퍼/킹거리(15) 세구라(10)
OPS : 하퍼(.882) 리얼뮤토(.820) 호스킨스(.819)
wOBA : 하퍼(.365) 호스킨스(.358) 리얼뮤토(.347)
wRC+ : 하퍼(125) 호스킨스(113) 리얼뮤토(108)
지난해 하퍼는 공격에서 남긴 아쉬움을 수비에서 달랬다. 하퍼는 2018시즌 중견수를 맡으면서 우익수 수비까지 무너지는 도미노 현상이 일어났다(DRS 중견수 -9, 우익수 -15). 필라델피아는 하퍼에게 우익수만 보도록 지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퍼는 시즌 초반 날아오는 타구에 우왕좌왕했다. 특히 타구가 머리 위로 날아가면 강가에 내놓은 어린 아이를 보는 심정으로 지켜봐야 했다.
승부욕이 강한 하퍼는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본능적으로 위축이 되는 자신을 견디기 힘들었다. 어느 날 하퍼는 경기가 끝나고 한 지도자를 찾아갔다. 필라델피아 1루 코치이자 외야 수비코치를 겸하고 있는 파코 피게로아(37)였다.
피게로아는 하퍼와 함께 필라델피아 유니폼을 입었다. 2012년 독립리그를 끝으로 선수 생활은 정리했지만, 다저스 마이너 타격 코디네이터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뛰어난 안목을 가지고 있었던 피게로아는 족집게 과외로 선수들 사이에서 신뢰가 두터웠다. 필라델피아는 외야수비와 베이스런닝을 피게로아에게 전담했는데, 피게로아의 조언을 구하기 위해 찾는 선수들이 문전성시를 이뤘다(Paco points라고 불렸다).
피게로아는 하퍼가 골드글러브도 수상할 수 있는 외야수라고 생각했다. 타구 판단을 잘 해냈고, 타구를 쫓는 스피드도 빨랐다. 무엇보다 타구 처리 과정에서 어떠한 두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하퍼의 수비를 유심히 살펴본 피게로아는 하퍼가 첫 반응 속도가 다소 느리다고 분석했다. 따라붙는 가속도는 나쁘지 않았지만, 출발이 꼬이다 보니 놓치는 타구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피게로아는 하퍼의 수비 위치를 좀 더 깊게 조정했다. 조금 뒤로 가더라도 주자를 묶을 수 있는 어깨가 있기 때문이었다.
타구를 이전보다 여유있게 볼 수 있게 된 하퍼는 수비에서 안정을 되찾았다. 골드글러브는 받지 못했지만, 우익수 DRS가 +10이 될 정도로 향상됐다. 메이저리그에서 우익수 수비 이닝이 가장 많았던 하퍼(1318이닝)는 코디 벨린저(+20) 무키 베츠(+16) 조시 레딕(+11) 다음으로 이 부문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주자들은 하퍼가 뒤로 물러나자 적극적으로 추가 베이스를 노렸다. 그러나 이는 하퍼와 피게로아가 설치한 덫이었다. 하퍼는 어시스트 13개로 메이저리그 우익수 1위에 올랐다(벨린저 10개).
그렇다면 <팬그래프>가 런세이브를 매긴 2003년 이후 필라델피아 우익수 통산 1위에 올라있는 선수는 누구일까. 하퍼가 워싱턴 시절 멘토로 따른 제이슨 워스였다. 필라델피아로 오기 전까지 눈에 띄지 않았던 워스는 2007년 주전 자리를 확보한 뒤 이듬해 필라델피아 월드시리즈 우승 멤버가 됐다. 찰리 매뉴얼 감독을 만나 위협적인 타자가 된 워스는 2007-10년 동안 95홈런 300타점을 집중했다(543경기 .282 .380 .506). 이 기간 포스트시즌에서 날린 11홈런은 필라델피아 역대 최다기록이다.
필라델피아에서 뒤늦게 빛을 본 워스는 2010년 12월 워싱턴 최초의 1억 달러 선수가 됐다(7년 1억2600만). 당시 워싱턴은 2년 연속 드래프트 전체 1순위 지명권을 활용하면서 미래를 설계하고 있었다(2009년 스트라스버그, 2010년 하퍼). 이미 전성기가 지난 워스는 필라델피아 시절의 파괴력은 보여주지 못했다. 하지만 팀의 고참 선수로서 이제 막 발을 내딛은 선수들의 훌륭한 선배가 됐다.
긴 머리를 휘날리며 그라운드를 누비는 하퍼는 워스와 묘하게 닮았다. 워스는 하퍼가 언젠가는 필라델피아 선수가 될 줄 알았다고 말했다. 하퍼의 성향이 필라델피아와 어울린다는 뜻. 2031년까지 필라델피아에 몸을 담아야 하는 하퍼는 오랫동안 팀의 버팀목이 되어줘야 한다. 이는 워싱턴에서 워스를 보고 배운 모습이다.
공교롭게도 워싱턴은 하퍼가 팀을 떠난 첫 해 곧바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그러자 하퍼에게도 자연스레 시선이 몰렸다. 옛 동료들의 우승을 멀리서 바라본 하퍼는 결코 질투나 시기심은 없다고 말했다. 자신은 자신대로, 워싱턴은 워싱턴대로 최선의 선택을 했기 때문에 후회도 남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19세 데뷔 후 신인상, 22세 리그 MVP를 휩쓴 하퍼는 여전히 27살의 젊은 선수지만 어느덧 성숙함이 더해졌다.
필라델피아는 존 미들턴 구단주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올해도 우승 경쟁에 나선다. 하퍼는 필라델피아에서 우승 갈증을 해소할 수 있을까.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는 데뷔 후 늘 뒤쫓아갔던 트라웃을 앞서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기사제공 이창섭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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