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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MLB] 아쉬웠던 클리블랜드의 2000년대(04.17)

야구상식

by jungguard 2020. 4. 17.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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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블랜드시절 추신수와 헤프너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가 월드시리즈 우승에 걸린 시간은 4년이었다(1998년 창단, 2001년 우승). 반면 1961년에 창단한 텍사스 레인저스는 59시즌을 보낸 지금도 우승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첫 번째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을 견뎌낸 팀이 있다. 1883년 창단 후 98년이 걸린 필라델피아 필리스다. 필라델피아는 1903년 월드시리즈가 시작됐을 때 있었던 '오리지널 16' 중 가장 마지막으로 1980년에 우승했다.

 

1980년 필라델피아가 우승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팀 역대 최고의 타자와 팀 역대 최고의 투수가 함께 뛰었기 때문이다.

 

1972년 세인트루이스에서 건너온 스티브 칼튼은 1972(41경기 30완투 346.1이닝 27101.97)1977(36경기 17완투 283이닝 23102.64)에 이어 1980년 세 번째 사이영상 수상에 성공했다(38경기 13완투 304이닝 2492.34).

 

칼튼의 전성기는 네 번째 사이영상을 따내는 1982(38경기 19완투 295.2이닝 23113.10)으로 끝나는데, 1980년은 팀 역대 최고의 타자인 마이크 슈미트가 세 개 중 첫 번째 리그 MVP를 따냄으로써 본격적인 MVP급 활약을 시작하게 되는 해였다. 1980년은 필라델피아가 팀 역사상 유일하게 리그 MVP와 사이영상 투수를 함께 배출한 시즌이었던 것이다.

 

만약 칼튼의 전성기(1972~1982)와 슈미트의 전성기(1980~1986)가 좀더 겹쳤다면 필라델피아는 최소 한 번을 더 우승했을지도 모른다.

 

1962년에 창단해 2017년 우승까지 55년이 걸린 휴스턴 애스트로스에게는 역대 2위 기록에 해당되는 15시즌을 함께 뛴 크렉 비지오와 제프 배그웰이 있었다(역대 1위는 디트로이트 앨런 트램멀-루 휘태커의 19시즌). 시즌 후 배그웰이 먼저 은퇴함으로써 둘이 마지막으로 함께 뛴 2005년은 휴스턴이 창단 첫 월드시리즈 진출에 성공한 해였다. 하지만 내셔널리그 우승 팀이었던 휴스턴은 월드시리즈에서 만난 시카고 화이트삭스에게 4연패를 당했고 둘은 끝내 반지 없이 은퇴했다.

 

최고의 선수들이 동시대에 뛰는 것만큼 팀에게 행운인 것은 없다.

 

현재 진행 중인 최고기록에 해당되는 '71시즌 연속 우승 실패'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가 마지막으로 월드시리즈를 우승한 것은 1948년이었다. 1948년 클리블랜드에는 훗날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선수가 5명이나 있었다(밥 펠러, 밥 레몬, 세이첼 페이지, 래리 도비, 루 브드로).

 

그런 점에서 아쉬운 팀은 2000년대 중후반의 클리블랜드다. 구성원들의 최고 시즌이 절묘하게 겹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앨버트 벨, 짐 토미, 케니 로프턴, 매니 라미레스, 데이빗 저스티스, 로베르토 알로마, 후안 곤살레스 등. 1995년부터 2001년까지 메이저리그 최강을 자랑했던 타선이 해체된 후 가장 먼저 두각을 드러낸 선수는 트래비스 해프너였다.

 

메이저리그의 불모지인 노스다코타주 출신으로 199631라운드 지명을 받고 텍사스에 입단한 해프너는 200212월 클리블랜드로 트레이드됐다. 이반 로드리게스와 결별한 텍사스가 클리블랜드에서 포수 에이너 디아스를 데려간 트레이드였다.

 

텍사스(1루수 마크 테세이라, 지명타자 라파엘 팔메이로)에서는 자리가 없었던 해프너는 출루 능력과 장타력의 완벽한 조화가 마치 오클랜드 시절의 제이슨 지암비를 보는 것 같았다. 특히 2006년에는 77일까지 6개의 만루홈런을 때려냄으로써 1987년 돈 매팅리와 타이를 이뤘다.

 

해프너의 출루율/장타율/OPS 리그 순위

 

04 : .410(3) .583(4) OPS 0.993(2)

 

05 : .408(3) .595(3) OPS 1.003(2)

 

06 : .439(2) .659(1) OPS 1.097(1)

 

8월까지 125경기에서 올린 성적은 42홈런 116타점. 8월에만 13홈런 30타점을 기록한 해프너는 50홈런 150타점도 가능할 것 같았다. 새미 소사(19982001)를 제외하면 50홈런 150타점 기록은 1938년 지미 팍스가 마지막이었으며, 클리블랜드에서는 처음 나오게 될 귀한 기록이었다. 하지만 9월의 첫 날. 해프너는 텍사스 좌완 C J 윌슨이 던진 공에 오른손 골절상을 입고 시즌을 마감했다.

 

해프너는 이듬해 돌아왔지만 배트 스피드가 회복되지 못했고 MVP급 활약도 더 이상 없었다.

 

해프너가 마지막으로 최고의 활약을 한 2006. 클리블랜드에는 리그 최고의 1번타자가 등장했다. 그래디 사이즈모어였다. 클리프 리, 브랜든 필립스와 함께 바톨로 콜론 아니 오마 미나야의 유산이 된 사이즈모어는 그해 1932년 척 클라인(필라델피아)에 이은 역대 2호이자 1번타자 최초로 50(2루타) 10(3루타) 20(홈런) 20(도루)을 기록했다(.290 .375 .533). 92개의 장타(2루타 53, 3루타 11, 홈런 28) 역시 1번타자 신기록이었다.

 

2007년 사이즈모어는 24홈런 33도루와 함께 1번타자로서 101개의 볼넷을 얻어냈고(.277 .390 .462) 2008년에는 33홈런 38도루를 기록함으로써 클리블랜드 선수로는 1987년 조 카터에 이어 두 번째로 30-30 클럽에 가입했다(.268 .374 .502).

 

하지만 2006년부터 2008년까지의 승리기여도(fWAR)가 아메리칸리그 1위였던 사이즈모어의 전성기도 3년으로 끝났다. 2009WBC에 참가했다가 부상을 당한 것이 화근이었다. 이후 사이즈모어는 몸 상태가 좋았던 적이 거의 없었다.

사이즈모어가 최고의 1번타자 자리에서 내려온 2009. 클리블랜드에는 또 한 명의 걸출한 타자가 등장했다. 빌 버베이시 시애틀 단장의 선물 추신수였다.

 

20067월 시애틀에서 건너온 추신수는 20079월에 토미존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2008년 복귀 후 94경기에서 OPS 0.946(.309 .397 .549)을 기록하는 뛰어난 활약을 했다. 클리블랜드는 프랭클린 구티에레스를 시애틀로 보냄으로써 우익수 자리를 추신수에게 줬다.

 

추신수는 3할 타율과 함께 200920홈런 21도루(.300 .394 .489)201022홈런 22도루(.300 .401 .484)를 기록함으로써 클리블랜드 최초의 2년 연속 320홈런 20도루 타자가 됐다. 918일 캔자스시티 원정에서는 5타수4안타 3홈런 7타점 경기를 만들어냈는데, 스리런 홈런이 없어서 사이클링 홈런이 되지 못했다.

 

클리블랜드가 이렇게 뛰어난 우익수를 보유하게 된 건 매니 라미레스 이후 처음이었다. 그러나 추신수는 2011625일 조너선 산체스(샌프란시스코)가 던진 공에 왼 엄지 손가락이 산산조각나는 부상을 당함으로써 상승세에 제동이 걸렸다.

 

아쉽게도 클리블랜드는 해프너(2004~2006) 사이즈모어(2006~2008) 추신수(2009~2010)의 최고 시즌이 겹치지 않았다. 이는 마운드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CC 사바시아가 사이영상을 따낸 2007년은 클리프 리가 아직 개화하기 전이었으며, 리가 사이영상을 따낸 2008년에는 사바시아가 시즌 중반 밀워키로 트레이드됐다.

 

해프너의 2006, 사이즈모어의 2007, 추신수의 2010년 그리고 사바시아의 2007년과 클리프 리의 2008년이 모두 같은 해에 나왔다면 과연 클리블랜드는 어떻게 됐을까.

 

2006 해프너 : .308 .439 .659 (42117)

 

2007 그래디 : .277 .390 .462 (2433)

 

2010 추신수 : .300 .401 .484 (2222)

 

2007 사바시아 : 1973.21 (241.0)

2008 클리프리 : 2232.54 (223.1)

 

 

기사제공 김형준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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