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드센스
저스틴 벌랜더(bWAR 72.1)와 맥스 슈어저(bWAR 58.4) 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잭 그레인키(bWAR 65.9) 또한 역대급 롱런을 하고 있다.
2000년 이후 데뷔한 선수 중 그레인키는 30세 시즌까지의 통산 승리기여도(bWAR)가 8위였다. 하지만 31~35세 시즌에 기록한 승리기여도 25.9는 4위에 해당된다. 더 놀라운 것은 20대 시절의 구속을 유지하고 있는 벌랜더&슈어저와 달리, 그레인키가 구속 저하를 이겨내고 있다는 것이다.
30세 시즌까지 bWAR
62.2 - 클레이튼 커쇼
51.2 - 펠릭스 에르난데스
49.8 - CC 사바시아
45.4 - 크리스 세일
41.3 - 마크 벌리
40.8 - 저스틴 벌랜더
40.7 - 로이 오스왈트
40.1 - 잭 그레인키
39.3 - 콜 해멀스
31세 시즌 이후
31.3 - 저스틴 벌랜더(31~35)
30.1 - 로이 할러데이(31~36)
27.6 - 맥스 슈어저(31~34)
25.9 - 잭 그레인키(31~35)
25.3 - 클리프 리(31~35)
22.6 - R A 디키(31~42)
사이영상 시즌인 2009년 평균 93.7마일 패스트볼과 86마일 슬라이더를 던졌던 그레인키가 90.0마일(2019) 패스트볼로도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는 비결은 슬로우볼을 개척한 덕분이다.
그레인키는 지난해 14.6퍼센트의 커브(평균 70.6마일)와 0.9퍼센트의 이퍼스(평균 63.5마일)를 던졌는데, 두 구종의 합산 피안타율은 0.130이었다. 이는 나머지 구종(포심 싱커 슬라이더 체인지업) 합계인 0.251보다 훨씬 좋았다.
눈에 띄는 점은 그레인키가 28개의 이퍼스(eephus)를 던져 10타수 무피안타 3삼진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이는 그레인키가 초슬로우볼을 던지면 타자들은 참지 못하고 방망이를 내지만 결국은 정타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타구속도 평균 70.1마일)을 의미한다.
역대 가장 유명한 '이퍼스'를 던졌던 투수는 립 서웰(1932~1949년 활약)이다. 서웰이 던지는 이퍼스는 지상에서 7미터까지 솟았다가 스트라이크존 위를 살짝 통과하는 '초 아리랑볼'었는데, 1946년 올스타전에서 이를 공략해 홈런을 만들어냈던 테드 윌리엄스는 사실 앞발이 배터 박스를 벗어난 부정타격이었다. 메이저리그에서 13년을 활약한 서웰이 이퍼스를 던져 홈런을 맞은 것은 이때가 유일했다. 히브리어로 'nothing'을 뜻하는 이퍼스는 야구에서는 스피드를 최소화한 'nothing ball'을 의미한다. 그 구종이 커브인지 체인지업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주목할 만한 점은 투수들이 스피드에 집착할수록 이퍼스의 경쟁력도 높아진다는 것이다. 지난해 메이저리그에서 구속이 70마일(113km/h) 미만이었던 공의 피안타율은 0.216로 95마일(153km/h) 이상 공이 기록한 0.249보다 훨씬 좋았다. 높은 스피드를 통해 이와 비슷한 피안타율을 만들어내려면 99마일(159km/h) 이상을 기록해야 했다(99마일 이상 공 피안타율 0.213).
지난해 메이저리그 투수들이 던진 70마일 미만 공의 24퍼센트에 해당되는 153개를 혼자 던진 그레인키는 리그의 평균 구속이 올라갈수록 느린 공의 경쟁력이 높아진다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챈 것이다.
패트릭 코빈(워싱턴) 역시 70마일이 되지 않는 공을 그레인키 다음으로 많이 던졌다. 하지만 커브로 기록된 이 79개의 공은 사실은 느린 슬라이더다(인사이드MLB '워싱턴의 또 다른 보물 패트릭 코빈' 참조). 류현진은 이에 대해 "패트릭 코빈은 말도 안 되는 80마일대의 슬라이더로 삼진을 잡아낸다. 그걸 보고 '어 이게 뭐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게 궁금해서 영상을 찾아봤다"고 한 바 있다(출처 이영미 人터뷰).
워싱턴에는 코빈 말고도 초슬로우볼을 던지는 또 한 명의 투수가 있다. 2006년에 데뷔해 14시즌 동안 108승108패 3.98(bWAR 29.2)의 통산 성적을 만들어낸 아니발 산체스(36)다.
베네수엘라 출신인 산체스는 2001년 보스턴에 입단했다. 보스턴은 2005년 11월 핸리 라미레스와 산체스를 플로리다에 주고 조시 베켓과 마이클 로웰을 데려왔고 이는 2007년 월드시리즈 우승으로 이어졌다(베켓 2007년 PS 4경기 4승 1.20, 로웰 월드시리즈 MVP).
조 지라디 감독(현 필라델피아)의 시즌이었던 2006년, 플로리다는 1499만 달러의 연봉총액으로 78승84패를 기록하는 돌풍을 일으켰다. 22살의 루키 투수였던 산체스(114이닝 10승3패 2.83)는 조시 존슨(157이닝 12승7패 3.10) 스캇 올슨(181이닝 12승10패 4.04) 리키 놀라스코(140이닝 11승11패 4.82)와 함께 메이저리그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온 '신인 10승 네 명'을 달성했다.
특히 산체스는 2006년 9월7일 애리조나전에서 노히트노런을 달성했는데, 이는 2004년 5월19일 랜디 존슨의 퍼펙트게임 이후 처음 나온 노히터였다. 존슨과 산체스 사이 6364경기는 지금도 메이저리그 최고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지라디 감독이 무리를 시킨 네 명은 모두 부상에 쓰러졌다(지라디가 1년 만에 경질된 이유다). 산체스도 2007년 5월 어깨 관절와순 수술을 받아야 했다.
산체스가 다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것은 2013년이었다. 2012년 7월 제이콥 터너 트레이드를 통해 디트로이트로 건너온 산체스는 몸 상태가 절정이었던 2013년(평균 93.0마일) 29경기 182이닝, 14승8패 2.57(ERA 리그 1위)의 성적으로 팀 동료 맥스 슈어저 그리고 다르빗슈 유(텍사스)와 이와쿠마 히사시(시애틀) 두 일본인 투수에 이어 사이영상 투표 4위에 올랐다(5위 크리스 세일). 5월25일 미네소타전에서는 9회 1사 후 조 마우어에게 안타를 맞아 통산 두 번째 노히터를 놓치기도 했다.
산체스와 함께 슈어저(214이닝 21승3패 2.90) 벌랜더(218이닝 13승12패 3.46) 덕 피스터(209이닝 14승9패 3.67) 릭 포셀로(177이닝 13승8패 4.32)가 최고의 로테이션을 이룬 2013년 디트로이트는 보스턴과 만난 리그 챔피언십시리즈에서 산체스-슈어저-피스터가 세 경기 연속 6이닝 노히트를 기록하고도 시리즈를 패했다. 2승3패로 뒤진 디트로이트는 벌랜더가 7차전 등판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6차전에서 셰인 빅토리노에게 역전 만루홈런을 맞고 패했다.
이후 구속 저하가 찾아온 산체스는 2018년 미네소타와 1년 250만 달러의 스플릿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스프링캠프에서 방출을 당했다. 그러나 더 이상 강속구를 던질 수 없다면 더 느린 공을 던지기로 한 산체스의 새로운 피칭은 점점 완성되고 있었다.
3월17일 애틀랜타와 마이너 계약을 맺은 산체스는 부상으로 4,5월을 제대로 뛰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 24경기에서 7승6패 2.83을 기록하고 애틀랜타의 지구 우승에 적지 않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애틀랜타는 산체스를 잡지 않았다(애틀랜타가 산체스를 대신해 선택한 베테랑 투수는 2019년 댈러스 카이클과 2020년 콜 해멀스다).
2년 1900만 달러라는 조촐한 계약으로 워싱턴에 입단한 산체스는 지난해 정규시즌(166이닝 11승8패 3.85)에 이어 포스트시즌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했다. 류현진과 맞대결이었던 디비전시리즈 3차전의 5이닝 9K 1실점에 이어 워싱턴이 디비전시리즈에서 5차전 승부를 하는 바람에 슈어저 스트라스버그 코빈을 대신해 나선 챔피언십시리즈 1차전에서는 7.2이닝 5K 무실점으로 기선제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워싱턴은 세인트루이스를 만난 NLCS에서 1차전 산체스가 7.2이닝 1피안타 무실점, 2차전 슈어저가 7이닝 1피안타 11K 무실점, 3차전 7이닝 12K 무자책을 기록함으로써 4연승을 하고 월드시리즈에 올랐다. 특히 산체스와 함께 그에게 워싱턴에서 같이 뛰자고 한 슈어저는 2013년 디트로이트에서 이루지 못한 월드시리즈 진출을 완성한 셈이 됐다(불쌍한 일리치 구단주). 월드시리즈 우승이 확정된 순간 둘은 부둥켜 안고 울었다.
지난 2년을 거쳐 완성된 산체스의 레퍼토리는 마치 그레인키를 보는 듯하다.
산체스 레퍼토리(평균 구속)
90.5 - 패스트볼
87.6 - 커터
84.3 - 스플리터
83.2 - 슬라이더
76.9 - 커브
70.7 - 체인지업
그레인키 레퍼토리(평균 구속)
90.0 - 패스트볼
87.4 - 체인지업
83.7 - 슬라이더
70.6 - 커브
63.5 - 이퍼스
특히 '버터플라이 체인지업'이라는 이름이 붙은 산체스의 아주 느린 체인지업은 패스트볼과 무려 20마일(32km/h)의 구속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산체스의 주무기이자 비슷한 궤적을 가진 스플리터와도 15마일(24km/h) 가까운 차이가 나고 있다. 같은 타이밍으로는 절대로 때려낼 수 없는 공인 것이다. 지난해 산체스의 버터플라이 체인지업은 그 자체로도 36타수3피안타 14탈삼진을 기록했을 뿐 아니라 평균 90마일밖에 되지 못한 산체스의 패스트볼에 엄청난 도움을 줬다.
워싱턴 선발진이 슈어저(2020년 3590만) 스트라스버그(3500만) 코빈(1942만)에게 너무 많은 돈을 주고도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비결 중 하나는 가성비 좋은 산체스(2020년 700만)가 4선발의 자리를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기사제공 김형준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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