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드센스
뉴욕 양키스(영어: New York Yankees)는 미국 뉴욕주 뉴욕 브룽크스를 연고지로 하는 프로 야구팀이다.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동부 지구 소속이다.
아메리칸 리그 초창기 시절의 8개 프랜차이즈 구단 중의 하나이며, 팀의 기원은 1901년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설립된 '볼티모어 오리올스'였다.(지금의 볼티모어 오리올스와는 다른 팀임) 1903년 뉴욕으로 연고지를 옮기면서 팀의 명칭을 '뉴욕 하이 랜더스'로 바꾸었고 1913년 다시 '뉴욕 양키스'로 변경하였다. 1923년부터 2008년까지 양키스의 홈구장은 양키 스타디움이었는데, 2009년 시즌부터는 새로운 구장인 뉴 양키 스타디움을 홈구장으로 사용한다.
양키 스타디움(Yankee Stadium)
개장 : 2009년 4월 2일
소재지 : 미국 뉴욕 주 뉴욕 시 브롱스 1 East 161st Street
홈 구단 : 뉴욕 양키스 (MLB) (2009~ 현재) 뉴욕 시티 FC (MLS) (2015~ 현재)
천연 잔디(켄터키 블루 그래스)
크기 : 좌측 폴대 97m, 좌중간 122m 센터 124m 우중간 117m, 우측 폴대 96m 백네트 16m
건설 비용 : 15억 달러(한화 1조 6500억 원)
수용 인원 : 49,641석(야구) 54,251석(축구, 미식축구)
양키스는 메이저 리그 우승 27번, 아메리칸 리그 우승 40번을 차지하였는데 북미 프로 스포츠 팀 역사상 이보다 더 많은 우승을 차지한 팀은 없으며, 근접한 기록은 1999년 24번째 '스탠리 컵'을 들어 올린 몬트리올 캐내디언스이다.
우승 기록
월드 시리즈(27회)
1923, 1927, 1928, 1932, 1936, 1937, 1938, 1939, 1941, 1943, 1947, 1949, 1950, 1951, 1952,1953, 1956, 1958, 1961, 1962, 1977, 1978, 1996, 1998, 1999, 2000, 2009
아메리칸 리그(40회)
1921, 1922, 1923, 1926, 1927, 1928, 1932, 1936, 1937, 1938, 1939, 1941, 1942, 1943, 1947,1949, 1950, 1951, 1952, 1953, 1955, 1956, 1957, 1958, 1960, 1961, 1962, 1963, 1964, 1976,1977, 1978, 1981, 1996, 1998, 1999, 2000, 2001, 2003, 2009
지구(18회)
1976, 1977, 1978, 1980, 1981, 1996, 1998,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2009, 2011, 2012
와일드카드 획득(7회)
1995, 1997, 2007, 2010, 2015, 2017, 2018
영구결번이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많은 팀이다. 전 구단 영구결번인 42번을 제외해도 2018년 기준 무려 22명이다. 2014년을 마지막으로 팀의 주장이자 최고의 인기 스타인 데릭 지터(2번)까지 은퇴하면서 0번을 제외한 한 자릿수 등번호는 양키스에서 쓸 수 없게 되었다.
1. 빌리 마틴(Billy Martin): 2루수로 1950년대 양키스의 월드 시리즈 제패에 한몫한 경력이 있지만, 더 유명한 것은 감독으로서의 경력. 특히 1970년대 양키스의 수장을 맡아 팀의 암흑기를 끝냈다. 다만 전 구단주인 조지 스타인브레너와 사이가 상당히 안 좋았다. 무려 5번씩이나 해고를 당했을 정도. 어려웠던 시기에 스타인브레너 구단주 밑에서 양키스의 전성기를 만든 인물이다. 월드 시리즈 우승 5회. (선수 4회, 감독 1회)
2. 데릭 지터(Derek Jeter): 양키스의 전성기를 이끈 '양키스 Core 4'의 멤버이자 유격수 자리를 지키면서 양키스의 중흥기를 이끈 뉴욕의 연인. 0번을 제외한 양키스의 마지막 한 자릿수 등번호를 가진 선수이다. 별명은 '11월의 사나이(Mr. November)'. 양키스 프랜차이즈 유일의 3000안타 타자이기도 하다. 월드 시리즈 우승 5회.
3. 베이브 루스(Babe Ruth): 간단히 말하자면 통산 714 홈런을 쳤고, 양키스를 최고의 인기 구단으로 만들었고, 야구의 모습을 완벽하게 바꿔 놓은 사나이.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이다. 월드 시리즈 우승 7회 (레드삭스 3회, 양키스 4회), 1936년 명예의 전당 헌액.
4. 루 게릭(Lou Gehrig): 2130경기 연속 출장 기록과 메이저리그 통산 최다 만루 홈런 2위이며, 통산 타율 0.340에 493 홈런을 쳐낸 강타자. 루게릭병으로 인한 비극적인 은퇴로 인해 더 유명하다. 그의 등번호 4번은 메이저리그 최초이자, 전 세계 스포츠 역사상 두 번째로 영구 결번된 번호이다. 월드 시리즈 우승 6회, 1939년 명예의 전당 헌액.
5. 조 디마지오(Joe DiMaggio): 1940년대와 50년대 미국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슈퍼스타. 깔끔한 매너와 항상 웃는 얼굴로 실력과 함께 항상 인기가 많았던 선수. 56경기라는 역대 최다 경기 연속 안타 기록을 가지고 있다. 루스-게릭 시대를 잇는 후계자로서 타격의 달인인 보스턴의 테드 윌리엄스와 라이벌로 한 시대를 풍미했으며 야구 인기를 끌어올리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 월드 시리즈 우승 9회, 1955년 명예의 전당 헌액.
6. 조 토레(Joe Torre): 선수 시절에는 양키스에서 뛰지도 않았고, 지도자 시절에도 양키스에 부임하기 전까지는 그저 그런 감독이었지만, 양키스에 와서 우승 4번을 차지하며 명감독 위치에 올랐다. 그렇다고 선수 빨로 치부하기도 그런 것이 스타인브레너 구단주의 성질머리를 감당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인물이라는 점 하나만으로도 능력 입증. 월드 시리즈 우승 4회, 2014년 명예의 전당 헌액.
7. 미키 맨틀(Mickey Mantle): 통산 536 홈런을 때려낸 강타자이자 야구 역사상 최고의 스위치히터. 잦은 부상을 달고 뛰면서도 양키스의 중견수로 맹활약했다.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고, 올스타 20번과 리그 MVP 3번을 기록한 슈퍼스타이다. 월드 시리즈 우승 7회, 1974년 명예의 전당 헌액.
8(공동)
빌 디키(Bill Dickey): 1930년대와 40년대 양키스의 전성기 시절 안방을 책임진 포수. 11차례 올스타에 선정되었지만, 무엇보다 그의 공적은 코치 시절 후배인 요기 베라를 키워냈다는 점이다. 월드 시리즈 우승 8회, 1954년 명예의 전당 헌액.
요기 베라(Yogi Berra): 빌 디키의 뒤를 이어 양키스의 주전 포수가 된 선수. 빼어난 타격 실력 덕분에 세 차례 리그 MVP를 수상했으며, 은퇴 이후에는 양키스 감독을 잠시 맡기도 했다. 명언과 관련해서도 유명하다. 월드 시리즈 우승 10회, 1972년 명예의 전당 헌액.
9. 로저 매리스(Roger Maris): 19'61'년에 '61'홈런을 달성, 베이브 루스의 기존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깬 선수. 양키스 슬러거 라인을 미키 맨틀과 함께 이어갔다. 다만 양키스 팜 출신이 아닌 탓으로 차별을 많이 받았다. 뼈가 부러진 상태에서 월드 시리즈에 출전해 1 홈런에 그치자 뉴욕 언론들이 꾀병이라고 디스 걸었을 정도. 하지만 오늘날 약물 파동 이후에는 진정한 홈런왕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월드 시리즈 우승 3회.
10. 필 리주토(Phil Rizzuto): 타격 스탯은 별 볼 일 없지만, 당대 최고 수준의 수비를 자랑했던 주전 유격수. 1950년에는 리그 MVP로도 선정된 적이 있다. 은퇴 이후에는 40년 동안 해설가로 활동했다. 월드 시리즈 우승 7회, 1994년 명예의 전당 헌액.
15. 서먼 먼슨(Thurman Munson): 양키스의 포수 계보를 이어가는, 뛰어난 공격력을 갖추었던 당대 최고 수준의 포수. 클럽하우스의 리더로서 팀에 파이팅을 불어주는 선수였다. 그러나 자신의 주가를 한창 올리던 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인해 안타깝게 요절했다. 월드 시리즈 우승 2회.
16. 화이티 포드(Whitey Ford): 월드 시리즈 통산 10승으로 역대 최다 승 기록을 가진 투수. 정규 시즌에는 통산 236승을 기록했고 일명 회장님으로 불렸다. 메이저리그의 송진우 최강의 빅게임 피처로 명성이 높았기 때문에 약간 적어 보이는 승수에도 불구하고 양키스 역사상 최고의 투수로 인정받고 있다. 월드 시리즈 우승 6회, 1974년 명예의 전당 헌액.
20. 호르헤 포사다(Jorge Posada): 양키스의 전성기를 이끈 '양키스 Core 4'의 멤버이자 요기 베라와 서먼 먼슨의 뒤를 잇는 양키스의 안방마님. 포수임에도 불구하고 빼어난 공격력으로 양키스 타선의 주축이었지만, 포수라는 포지션이 워낙 단명한 만큼 '양키스 Core 4' 멤버 중에서는 가장 일찍 선수 생활을 마쳤다. 월드 시리즈 우승 4회.
23. 돈 매팅리(Don Mattingly): 양키스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인 1980년대와 90년대 초, 팀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켰던 강타자. 별명은 안타를 잘 친다는 의미의 'The Hit Man'이다. 1루수로서 골드 글러브를 9번 차지했고, 실버 슬러거 3회와 리그 MVP 1회를 수상했다. 1 시즌 만루 홈런 6개로 메이저리그 기록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클러치 능력이 좋았다. 역대 양키스 주장 가운데 우승 반지가 없는 유일한 주장이다.
32. 엘스턴 하워드(Elston Howard): 양키스 최초의 '유색 인종' 선수였다. 포수와 좌익수를 맡으며 요기 베라의 후계자가 되기도 했다. 1963년에는 리그 MVP로도 선정되었으나 통산 성적은 다소 평범한 편이다. 아메리칸 리그 역대 최초의 흑인 코치이기도 하다. 월드 시리즈 우승 6회. (선수 4회, 코치 2회)
37. 케이시 스텡겔(Casey Stengel): 양키스 역사상 최고의 감독을 고르라면 꼭 나오는 전설적인 명감독. 별명은 '노교수님(The Old Professor)'. 팀에게 우승을 7번이나 안겨주었던 인물이다. 양키스뿐만 아니라 같은 연고의 뉴욕 메츠에서도 영구 결번된 상태이다. 월드 시리즈 우승 9회 (선수 2회/자이언츠, 감독 7회/양키스), 1966년 명예의 전당 헌액.
42(공동)
마리아노 리베라(Mariano Rivera): 양키스의 전성기를 이끈 '양키스 Core 4'의 멤버이자 '야구 역사상 최고의 마무리 투수'로 요약되는 위대한 투수. 메이저리그 최다 세이브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 별명으로는 'Mariano'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를 딴 'Mo', 그의 등장 테마곡인 메탈리카의 'Enter Sandman'에서 따온 'Sandman'이 있다. 은퇴 이후에는 선교 활동을 다니고 있다. 월드 시리즈 우승 5회, 2019년 명예의 전당 헌액.
재키 로빈슨(Jackie Robinson): 전 구단 영구결번.
44. 레지 잭슨(Reggie Jackson): 별명은 '10월의 사나이(Mr. October)'로, 많은 삼진과 불 같은 성격에도 불구하고 월드 시리즈 통산 타율 0.357, 장타율 0.755, 홈런 10개를 기록했고 특히 1977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한 경기 3 연타석 홈런을 비롯한 4 홈런 8타점이라는 전설과도 같은 활약을 선보였다. 정규 시즌에도 통산 563 홈런을 기록한 강타자. 월드 시리즈 우승 5회 (애슬래틱스 3회, 양키스 2회), 1993년 명예의 전당 헌액.
46. 앤디 페티트(Andy Pettitte): 양키스의 전성기를 이끈 '양키스 Core 4'의 멤버이자 정규 시즌에서 통산 256승, 포스트시즌에서 메이저리그 최다 기록인 19승을 올린 투수이다. 다만 성장 호르몬 복용 이력이 흠. 월드 시리즈 우승 5회.
49. 론 기드리(Ron Guidry): '루이지애나의 번개(Louisiana Lightning)'라는 별명으로 불린 1970년대와 80년대 양키스의 에이스 투수. 팀의 짧은 전성기와 최악의 암흑기를 흔들림 없이 지키면서 단기간에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던 선수이다. 월드 시리즈 우승 2회.
51. 버니 윌리엄스(Bernie Williams): 1990년대와 2000년대 초, 정교한 타격과 켄 그리피 주니어에 비견되는 안정적인 중견수 수비로 양키스의 센터 필드를 굳건하게 지켰던 선수. 은퇴 이후에는 재즈 기타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월드 시리즈 우승 4회. 윌리엄스의 존재로 인해 랜디 존슨은 양키스에서는 41번을 달고 활약했다.
13. 알렉스 로드리게스(Alex Rodriguez): 메이저리그 최고의 슈퍼스타지만, 양키스에 와서 2번의 도핑 적발로 인해 완전히 몰락해버린 타자. 그래도 아직까지는 현지 양키스 팬들에게 적지 않은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는 중이다. 월드 시리즈 우승 1회.
21. 폴 오닐(Paul O'Neill): 신시내티에서는 비교적 평범했으나 양키스 온 이후에는 대폭발. 클럽하우스에 폭발적인 승부욕을 심어 넣은 주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은퇴 이후에는 YES Network 해설가로 활동 중이다. 월드 시리즈 우승 5회. (레즈 1회, 양키스 4회)
1900년 말에, 웨스턴 리그의 수장 밴 존슨(Ban Johnson)은 동부의 세 도시를 추가해 리그를 아메리칸 리그로 재조직했다. 뉴욕에 연고를 둔 팀을 추가하려던 계획은 내셔널 리그의 뉴욕 자이언츠의 정치적 압력으로 무산되었고, 대신에 메릴랜드주의 볼티모어에 팀을 창설하게 되었으며 별칭은 오리올스가 되었다.
존 맥그로(John McGraw)가 감독이 되어 1901년부터 경기를 갖게 되었지만, 1902년 시즌 중 리그 회장인 존슨이 경기장 내에서의 거친 플레이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자, 맥그로는 이에 대해 불만을 갖고 비밀리에 뉴욕 자이언츠로 자리를 옮겼다. 자이언츠는 AL이 개입할 때까지, 맥그로를 통해 오리올스의 지배지분을 확보해 선수들을 유출했다. 1903년 1월, 분쟁해결과 공존을 위한, 이른바 "평화협상"이 개최되었는데, 존슨이 요구한 AL 팀의 뉴욕 입성은 투표에 부친 결과 16개의 메이저 리그 구단주 중에서 자이언츠의 존 T. 브러시(John T. Brush)를 제외한 나머지 15개 구단의 찬성을 얻어 승인되었다. 오리올스의 새 구단주인 프랭크 J. 파렐(Frank J. Farrell)과 윌리엄 S. 데버 리(William S. Devery)는 자이언츠의 방해를 받지 않는 위치에 새 구장을 건립하여 뉴욕으로 이전했다.
뉴욕으로 연고지를 옮긴 뒤의 첫 근거지는, 맨해튼 섬에서 가장 높은 지대 중의 하나인 165번가와 브로드웨이의 모퉁이에 세워졌다. 구장이 고지대(High Land)에 있다는 것과, 회장의 이름이 조셉 고든 (Joseph Gordon)이라는 것에서, 사람들은 영국 보병 부대의 명칭인 고든 하이 랜더스(The Gordon Highlanders)를 떠올렸고, 여기에서 하이 랜더스라는 이름이 탄생했다. 언론과 사람들에게서 널리 불리던 이 명칭이 공식적으로 채택됐는지에 대한 증거는 없다. 유니폼에는 검은색의 N과 Y만이 있었을 뿐이다. 힐탑 파크(Hilltop Park)도 정식 명칭은 '아메리칸 리그 파크'였으나 근처의 폴로 그라운드보다 높은 데 있는 데다 팀 이름도 하이 랜더스로 불리자 사람들이 붙인 별명이었다.
하이 랜더스는 1904년과 1906년, 1910년에 리그 2위에 오르기도 했으나, 처음 15년 대부분의 기간은 최하위권을 맴돌았다. 더욱이 구단 운영상의 문제점과 1루수 헐 체이스 등이 연루된 승부 조작 소문 등이 팀에 악영향을 미쳤다.
하이 랜더스가 하이 랜더스가 페넌트레이스 우승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때는 1904년 시즌이었다. 시즌 내내 하이 랜더스가 좋은 성적을 거두자 자이언츠의 구단주는 "만약 하이 랜더스 같은 '마이너급'의 팀이 월드 시리즈에 진출한다면 시합을 하지 않겠다"라고 공언하기도 했다. 아메리칸 리그의 우승 팀을 결정하기 위한 최종전에서 하이 랜더스와 보스턴 아메리칸즈(1908년에 레드삭스로 개명)가 만났고, 하이 랜더스의 투수 잭 체스브로의 끝내기 폭투로 아메리칸즈가 우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이언츠는 시합을 거부해, 그 해의 월드시리즈는 무산되고 말았다. 월드시리즈가 열리지 않은 해는 이때와 선수노조가 파업한 1994년의 2회뿐이다. 하지만 언론의 신랄한 비판을 받은 자이언츠의 구단주는 월드시리즈 제도의 기본 골격을 정력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덧붙여 이 시합 이후 100년 동안 레드삭스는 리그 우승을 결정하는 시합에서 양키스를 한 번도 이기지 못하게 된다.
1911년에 자이언츠의 홈구장 폴로 그라운드에 화재가 일어나서 구장 사용이 어려울 때, 하이 랜더스가 힐탑 파크를 제공함으로써 두 팀 간에 화해 분위기가 생겼고, 그 결과 1913년에 폴로 그라운드가 새로 지어지자 하이 랜더스는 홈구장을 옮겨 뉴욕 자이언츠와 공동으로 쓰게 되었다. 저지대로 옮겨온 이후 "하이 랜더스 (Highlanders)"라는 명칭이 맞지 않게 되자 언론들은 대체할 다른 명칭을 찾게 되었다.
1904년 초 뉴욕 프레스의 스포츠국장 짐 프라이스가 양키스(Yankees 혹은 Yanks)라는 별명을 만들어 붙였는데 헤드라인에 쓰기 편하다는 이유였다. 이 단어는 점차 널리 퍼지면서 1910년대에는 이미 많은 언론들이 쓰고 있었다. 결국 언론들이 붙여준 애칭은 공식적인 팀 명칭이 되었다.
한편 1910년대 중반에, 공동 구단주인 파렐(Farrell)과 데버 리(Devery)는 사이가 나빠진 데다, 둘 다 자금부족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구단을 계속 소유하기 어렵게 되었다. 1915년 초에, 구단은 제이콥 루퍼트(Jacob Ruppert) 대령과 틸링 해 스트 휴스턴(Tillinghast L'Hommedieu Huston) 대위에게 125만 달러의 금액으로 매각되었다. "루퍼트 양조장"의 상속인으로, 8년간(1899년~1907년) 연방 하원 의원이기도 했던 루퍼트는, 나중에 "45만 달러로, 두드러진 재능을 가진 선수도 없고, 평판도 별로 없는, 게다가 자기 구장조차 없는 구단을 샀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루퍼트는 재력과 의지를 갖춘 구단주였고, 팀은 루퍼트가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전성 시기를 맞게 되었다.
구단 인수 후에 몇 년 동안 새 구단주 루퍼트는 적극적인 투자를 펼쳐 선수단 연봉을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고 타 팀의 좋은 선수들을 영입했다. 영입 선수 중 팀 전력에 도움이 되는 선수는 대부분 보스턴 레드삭스 출신이었다. 당시 레드삭스의 구단주는 브로드웨이 공연 제작에 더 신경을 쓰던 해리 프레이지(Harry Frazee)였는데, 공연 제작 비용에다 팀을 인수할 때의 대출로 자금 압박이 심했기 때문에 야구단을 제대로 운영하기보다는 선수들을 팔아 자금을 융통하려고 했다. 양키스는 그 덕분에 1919년부터 1922년까지 레드삭스로부터 웨이트 호이트(Waite Hoyt), 해리 하퍼(Harry Harper), 월리 샹(Wally Schang), 마이크 맥넬리(Mike McNally), 에버렛 스콧(Everett Scott), 조 듀간(Joe Dugan), 허브 페노크(Herb Pennock) 등을 영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중 최고의 선수는 1920년 1월에 영입된, 투수에서 야수로 변한 베이브 루스였다. 이미 최고 연봉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금액을 요구하는 바람에 감당할 의사가 없던 레드삭스는 그를 양키스로 트레이드해버렸다. 전년도에 시즌 최다 홈런 기록(29개)을 경신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양키스가 영입 비용으로 지출한 금액은 12만 5천 달러의 현금과 레드삭스의 구장 펜웨이 파크를 저당 잡은 빚 30만 달러였다. 레드삭스에게는 또 다른 노림수가 있었는데, 양키스에 좋은 선수를 보내 그들의 실력이 올라가면 보스턴과 라이벌 관계가 만들어질 것이고, 이로 인해 서로의 흥행수입이 높아지기를 기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나 가혹해서, 베이브 루스 트레이드 이후 84년 동안 레드삭스는 월드시리즈 챔피언이 될 수 없었고, 밤비노의 저주 때문이라는 말은 보스턴 레드삭스를 옭아맸다. 2004년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한 후에야 비로소 '저주는 없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1923년 지어진 양키 스타디움은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시멘트 공법으로 지어졌는데, 3층 건물로는 사상 처음이었고, 수용인원은 5만 8천 명이라는 엄청난 숫자였다. 개장 첫 경기에서 루스는 보기 좋게 홈런을 쳤고, 이 시즌에 루스가 기록한 타율 0.393은 지금도 양키스의 팀 기록이며 루스의 유일한 MVP 시즌이다. "루스가 지은 구장"이라는 칭호에 걸맞은 시작이었다.
루 게릭은 2,130 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세우며, 베이브 루스와 함께 최고의 강타선을 만들었다.
지난 2년 간의 월드시리즈에서 뉴욕 자이언츠에게 두 번 다 졌던 양키스는 1923년에 다시 만난 자이언츠에게 승리를 거둬 첫 월드시리즈 우승을 했다. 이전까지 자이언츠는 압도적인 강팀으로 뉴욕을 대표하는 구단으로 군림했으나, 이 시리즈를 계기로 양키스에게 그 역할을 넘겨주고는 밀려나다 결국 1950년대에 샌프란시스코로 이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1927년, 얼 콤스, 마크 쾨니히, 베이브 루스, 루 게릭, 밥 뮤젤, 토니 라제리가 포진한, 이른바 살인 타선(Murderers' Row)을 구축했고, 아메리칸 리그 기록인 110승을 거두며 (44패) 월드시리즈에서 피츠버그 파이리츠를 스윕 하는 막강한 위용을 자랑해 야구 역사상 최강의 팀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1939년, 1961년, 그리고 1998년 시즌의 양키스가 최고 팀이라는 견해도 있다.) 베이브 루스는 홈런 60개를 때려내며 34년간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단일 시즌 홈런 기록을 세웠고, 루 게릭은 0.373의 타율과 47 홈런, 175타점으로 베이브 루스가 1927년에 기록한 171타점 기록을 경신했다.
1928년에도 월드시리즈에 올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4-0으로 물리치면서 2년 연속 월드시리즈 우승을 거머 줬으나 이후 3년간은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가 아메리칸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동안 밀려 있어야 했다.
1929년 밀러 허긴스 감독은 시즌 종료 직전 왼쪽 눈 아래의 혹을 제거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가 5일 만에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아트 플레처와 밥 쇼크가 그 뒤를 이었으나 1년씩만 맡았다.
1931년, 조 매카시 감독이 부임하면서 양키스는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에 오르더니, 이듬해 1932년 월드시리즈에서 시카고 컵스를 스윕 하며 4년 만의 우승을 이뤄냈다. 이로써 월드시리즈에서 12 연속 경기 승리를 하게 됐는데 4차전, 1932년 1~4차전), 특히 리글리 필드에서 벌어진 3차전은 베이브 루스의 가장 유명한 홈런인 예고 홈런이 터지면서 화제를 더했다. 양키스의 첫 전성기를 이끈 루스는 1934년 시즌 후 내셔널 리그에 새로 가입한 보스턴 브레이브스로 이적하면서 더 이상 월드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했다.
루스가 이적하면서 마침내 게릭이 양키스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으나, "Joltin' Joe" 조 디마지오라는 새로운 주인공이 등장하면서, 게릭의 독주는 오래가지 않았다. 이 무렵 팀은 1936년부터 1939년까지 4년 연속 월드시리즈 우승이라는 전례 없는 기록을 세우면서 또 다른 전설을 써 내려갔으나, 1939년 게릭은 나중에 "루 게릭 병"이라고 불리게 되는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을 앓게 되면서 4월 30일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은퇴하게 되었다. 구단은 1939년 7월 4일을 '루 게릭의 날'로 선포하고 그의 등번호 4번을 메이저 리그 야구 사상 최초로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이날 행사에서 게릭은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사람'라고 지칭하는 유명한 고별사를 남겼고, 2년 후 사망했다. 그리고 24년 동안 구단주로 있으면서 양키스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루퍼트도 1939년 1월 13일 세상을 떠났고, 양키스는 그의 유산으로 남겨졌다.
2차 대전 이전의 황금시대의 마지막 해로 불리는 1941년, 전 미국은 메이저 리그의 두 가지 이벤트로 떠들썩했다. 레드삭스의 테드 윌리엄스는 4할 타율이라는 목표에 도전하고 있었고, 디마지오는 연속 경기 안타 기록에 도전하고 있었다. 디마지오의 연속 경기 안타 기록은 56경기가 되었고, 이 기록은 현재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한편, 디마지오가 기록을 세운 그 해, 양키스는 브루클린 다저스를 만나 시리즈 전적 4-1로 우승을 달성했지만, 시즌이 끝난 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메이저 리그는 디마지오를 포함해 리그에서 활동하던 많은 스타 선수들을 입대시켜야 했다. 팀은 그 와중에도 1942년 월드시리즈에 진출해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4-1로 패배했지만, 이듬해 월드시리즈에서는 똑같은 전적으로 되갚아주었다. 1945년, 루퍼트의 유산이었던 양키스는 건설업계의 거물 델 웹(Del Webb)과 동업자 댄 타핑(Dan Topping), 래리 맥파일(Larry MacPhail)에게 280만 달러의 금액으로 매각됐다. 다만, 맥파일은 1947년에 자신의 지분을 매각하였다.
1949년 정규시즌 마지막 두 경기를 남기고, 보스턴 레드삭스는 양키스를 1경기 앞선 1위를 하고 있어 반타작만 해도 지구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10월 1일의 첫 경기에서 양키스는 조니 린델(Johnny Lindell)의 홈런으로 5-4 승리를 거뒀고, 10월 2일의 마지막 경기에서 15 연속 선발승을 따낸 레드삭스의 엘리스 킨더(Ellis Kinder)를 무너뜨리면서 5-3의 승리를 거뒀다. 이 극적인 2연승으로 양키스는 아메리칸 리그 우승을 달성하고, 월드시리즈에서 브루클린 다저스를 4-1로 물리쳤다. 이 시즌 이후 양키스와 레드삭스는 라이벌 관계가 앙숙으로 변하게 되어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이 시즌부터 디마지오의 성적은 하락하기 시작해 1951년 은퇴했고, 디마지오가 은퇴하던 때에 '오클라호마의 아이'로 불렸던 미키 맨틀이 데뷔해 1954년 100승을 넘겼지만 인디언스가 아메리칸 리그 신기록인 111승을 거두는 바람에 2위로 밀려났고, 1955년에는 월드시리즈에서 5번 만나 모두 이겼던 다저스를 상대로 패배하고 말았다. 하지만 양키스는 여전히 강팀이었고, 1956년 월드시리즈 5차전이 벌어진 10월 8일, 투수 돈 라슨이 월드시리즈 역사상 유일의 퍼펙트게임을 기록했다. 포스트 시즌에서 퍼펙트게임은커녕 노히트 노런조차 없던 상태였고, 이후에도 2010년 로이 할러데이가 노히트 노런 할 때까지 54년 동안은 그 기록 하나뿐이었다. 그 경기의 여세를 몰아 양키스는 3년 만에 다시 우승컵을 되찾아왔고 라슨은 월드시리즈 MVP에 뽑혔다.
1957년 월드시리즈에서 밀워키 브레이브스에게 패배했다. 이어서 뉴욕 자이언츠와 브루클린 다저스가 서부 캘리포니아 주로 떠나면서 뉴욕에는 양키스 홀로 남게 되었다. 1958년 시즌 양키스는 월드시리즈에서 다시 만난 브레이브스를 상대로 복수극을 펼쳤는데 1승 3패의 열세를 뒤집은 극적인 승리였다.
1950년대의 10년 동안 양키스는 6번의 월드시리즈 챔피언에 올랐고 (1950년 ~ 1953년, 1956년, 1958년), 8번의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에 올랐다. (월드시리즈 제패 기간에 1955년과 1957년 추가) 맨틀, 포드, 베라, 엘스턴 하워드가 이끌던 팀에 로저 메리스가 합류하면서 1950년대의 영광을 1960년대에도 재현할 준비를 마쳤다. 지오의 빈자리를 메꾸며 양키스의 주축으로 자리 잡았다.
1960년 찰스 핀리(Charles O. Finley)가 애슬레틱스를 인수하면서 비로소 이런 거래는 중지되었지만, 이미 양키스는 20대 초반의 젊은 외야수 로저 메리스를 포함한 유망주를 빼낸 뒤였다. 1960년 매리 스는 아메리칸 리그 장타율 1위와 타점 1위를 차지하고, 미키 맨틀에 이어 홈런 2위를 기록하면서 골드 글러브와 아메리칸 리그 MVP로 뽑혔다.
1961년은 M&M포의 홈런 경쟁과 월드시리즈 우승으로 양키스 역사상 가장 인상 깊은 해 중의 하나가 되었다. 여름까지 맨틀과 매리 스는 빠른 속도로 홈런을 때려내면서 베이브 루스의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인 60 홈런에 도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맨틀이 엉덩이에 심각한 부상으로 레이스에서 이탈하면서 매리스 혼자 독주하게 되었다. 162경기의 마지막 경기를 치르게 된 10월 1일 매리 스는 61 홈런을 때려내면서 루스의 기록을 경신했으나, 커미셔너인 포드 프릭(Ford Frick)이 154 경기의 루스의 기록과 162경기의 매리스 기록을 별도로 기록하겠다고 선언해버렸다. 30년 동안 두 기록은 병기되었고, 그런 후에야 매리스의 기록은 1998년 마크 맥과이어가 70 홈런으로 경신할 때까지 단독 기록으로 남았다. 메이저 리그 기록은 경신되었지만, 여전히 아메리칸 리그 기록이기도 하다. 홈런 기록과 함께 팀은 240 홈런의 무서운 공격력을 보였고, 109승 53승을 기록하면서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으로 진출한 월드시리즈에서 신시내티 레즈를 물리치고 우승했다.
1962년, 양키스 홀로 있던 뉴욕에 내셔널 리그의 뉴욕 메츠가 퀸즈에 새롭게 자리를 잡았다. 양키스가 1962년 월드시리즈에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7차전까지 가는 혈전 끝에 승리하면서, 2년 연속이자, 지난 16년간 10번째인 월드시리즈를 우승을 거둔 반면에 신생팀인 메츠는 120패의 불명예 기록을 세웠다.
1963년 LA 다저스와 월드시리즈에서 만났으나 패배했다.
이듬해 요기 베라는 선수에서 은퇴하자마자 감독이 되었고, 노쇠한 양키스를 이끌고 팀을 월드시리즈에 5년 연속 진출시켰다. 하지만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게 7차전 끝에 패배하고 말았고, 이후 1976년 월드시리즈 전까지는 한 번도 진출하지 못하는 침체기에 들어섰다.
1981년 월드시리즈의 패배 이후 1994년까지 포스트 시즌에 오르지 못해, 팀 역사상 1921년 이후로는 가장 오랜 기간 동안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한다. 올스타급 1루수 돈 매팅리가 이끌던 양키스는 1980년대에서 가장 많은 승을 올렸으나 월드시리즈에 한 번도 진출 못한 두 번째 팀이 되었다. 이는 비교적 무난한 시즌들을 보냈지만 전력이 집중된 해가 없었다는 걸 뜻한다. 특히 투타의 불균형이 문제가 되었는데, 매팅리와 데이브 윈필드, 리키 헨더슨, 마이크 파글리아룰로(Mike Pagliarulo), 스티브 색스(Steve Sax), 제스 바필드(Jesse Barfield)가 포진한 공격력은 여전히 꾸준한 파워를 자랑했으나 선발투수진들이 받쳐주지 못했다. 70년대 후반부터 투수진의 든든한 축이었던 론 기드리는 1985년에 22승 6패를 올린 후 팔 부상으로 문제가 생기면서 1988년을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1985년과 1986년 시즌에는 아메리칸 리그 동부 지구 우승을 노려본 적이 있기도 했으나 각각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보스턴 레드삭스에 이은 2위만 하는 걸로 그쳤다. 1987년과 1988년 시즌은 두 해 다 시즌 중반까지는 선두를 달리고 있다가 뒷심 부족으로 후반기에 미끄러지면서 각각 4위와 5위에 그쳤다.
1980년대가 끝나가면서 양키스의 보루였던 공격력마저 쇠퇴하면서 팀은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어갔다. 헨더슨과 파글리아룰로는 1989년 시즌 중반에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됐고, 윈필드와 매팅리 둘 다 등부상을 겪으면서 윈필드는 1989년 시즌을 통째로, 매팅리는 1990년 시즌을 거의 다 날려먹었던 것이다. 유례를 찾기 힘들던 윈필드의 장기계약은 에인절스로 이적하면서 종료되었다. 1989년부터 1992년까지 자유계약 선수와 신인 드래프트에 거액의 자금을 투입했지만 모두들 기대만큼 성장해주지 못했고 팀은 패 기록만 올리고 있었다. 1990년 시즌은 그중 최악으로 1966년 이후 처음으로 꼴찌에 머물렀다.
전력이 약화된 데다 운까지 꼬인 팀의 모습을 상징하는 듯, 1990년 7월 1일 투수 앤디 호킨스(Andy Hawkins)는 시카고 화이트삭스를 상대로 안타 하나 내주지 않고 노히트 경기를 하고 있었으나 타격지원의 부재와 8회 말 볼넷과 야수들 실책 3개가 겹치면서 패배의 멍에를 지고 말았다. 특히 2사 만루에서 신인 좌익수 짐 레이 리츠(Jim Leyritz)가 플라이볼을 놓치지 않았다면 그대로 무실점으로 이닝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이 뼈아팠다. 노히트 게임을 하고도 패배를 한 투수들이 몇 있지만, 이 경기의 4점 차는 20세기 사상 최다 점수 차이였다. 11일 후, 양키스와 호킨스는 또다시 화이트삭스를 만났으나 이번에는 7회 강우 콜드로 노히트 게임을 당하는, 기막힌 상황을 당하고 말았다.
1990년 시즌 양키스 팬들은, 자신들의 팀이 꼴찌를 하고 레드삭스가 1위인 상황에서, 레드삭스가 양키 스타디움으로 올 때마다 조롱하기 위해 레드삭스의 마지막 월드시리즈 우승 연도인 '1918년!'이라는 구호로 경기장을 떠들썩하게 했다. 거기에다 몇몇은 '밤비노의 저주'를 상징하는 베이브 루스의 사진을 흔들거나 '1918년!'이 쓰인 티셔츠를 입기도 했다.
1995년 시즌이 끝나자, 스타인브레너는 쇼월터 감독을 해고하고 조 토리를 후임으로 정했다. 토리는 내셔널 리그에서 감독으로는 그다지 좋은 성적을 못 낸 편이었던지라 그의 선임을 조롱하곤 했다. (뉴욕 데일리 뉴스에서는 '멍청한 조'(Clueless Joe)가 헤드라인으로 등장했다.)그러나 그의 차분한 성품은 팀과 잘 맞는 편이었고, 스타인브레너가 구단주가 된 이후 가장 오래 감독 자리에 있게 된다.
1996년 양키스가 수년간 팀의 중심이 될 것으로 기대받던 4명의 선수들이(유격수 데릭 지터, 포수 호르헤 포사다, 선발투수 앤디 페티트, 투수 마리아노 리베라)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젊은 선수들은 팀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15년 만에 아메리칸 리그 동부 지구 1위에 올랐다. ALDS에서 텍사스 레인저스를 물리치고 ALCS에서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4-1로 물리치고는 대망의 월드시리즈 진출에 성공했다. ALCS 1차전에서 외야의 관중이 타구를 낚아챈 것이 심판의 오심으로 홈런으로 둔갑해 승리가 뒤집힌 1차전은 두고두고 회자되곤 한다. 월드시리즈 상대는 그렉 매덕스, 톰 글래빈, 존 스몰츠가 54승을 합작한 막강한 투수력의 전년도 챔피언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였다. 홈에서 치른 2경기를 모두 내줬으나, 적지에서의 3게임을 내리 이기면서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다시 홈에서 벌어진 6차전을 승리함으로써 18년 만에 월드시리즈 챔피언이 되었다. 1997년에는 와일드카드로 디비전 시리즈에 올랐으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게 3-2로 아쉽게 패했다. 단장인 밥 왓슨(Bob Watson)이 물러나고 후임으로 브라이언 캐시맨(Brian Cashman)이 단장직을 맡게 되었다.
야구 역사상 최고의 팀 중의 하나로 널리 알려진 1998년의 양키스는 정규 시즌에서 114승을 거두며 아메리칸 리그 기록을 세우는 동안 단 48번의 패배만 허용했고, 월드시리즈에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를 4-0으로 스윕 해버리는 막강한 전력을 자랑했다. 정규 시즌과 포스트 시즌에서 합작한 125승은 메이저 리그 역사를 통틀어 단일 시즌 기록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1998년 5월 17일 데이비드 웰스는 양키 스타디움에서 미네소타 트윈스를 상대로 퍼펙트게임을 달성했고, 이듬해 7월 18일 데이비드 콘이 '요기 베라의 날'을 축하라도 하듯이 양키 스타디움에서 몬트리올 엑스포스를 상대로 퍼펙트게임을 재현했다.
1999년 ALCS에서 레드삭스를 물리치고, 월드시리즈에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물리치면서 2년 연속 월드시리즈를 제패했다. 이 2 시즌 동안 6개의 포스트 시즌 시리즈를 모두 이기면서 (ALDS, ALCS, 월드시리즈) 22승을 하는 동안 패배는 단 3번뿐이었고, 시리즈 스윕도 4번이나 있을 정도로 포스트 시즌에서 마땅히 상대할 팀이 없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무리 중의 하나로 꼽히는 마리아노 리베라는 1990년대 후반부터 각종 포스트 시즌 기록을 세워가고 있다.
2000년, 양키스는 뉴욕 메츠와 1956년 이후 첫 번째 '지하철 월드시리즈'(Subway Series World Series)를 펼쳤다. 시리즈 전적 4-1로 월드시리즈 3연패를 달성했는데, 3차전에서 지면서 월드시리즈 연승은 14연승으로 마감됐으나, '58, '60~'64 팀만이 해낸 정규 시즌 4연패를 달성했다. 그리고 뉴욕에 발생한 9·11 테러의 영향 아래에 있던 포스트 시즌 동안 양키스는 오클랜드를 ALDS에서 물리치고, 116승의 정규시즌 다승 기록을 세운 시애틀 매리너스를 ALCS에서 물리쳤다. 그리고 이 4년의 기간 동안에 펼쳐진 12 개의 포스트 시즌 시리즈 중에서 11 연속 시리즈 승리 또한 챙겼다. 하지만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의 월드시리즈에서 마리아노 리베라가 7차전의 마무리로 나와 그 답지 않게 끝내기 안타를 맞으면서 챔피언 자리를 내놓고 말았다. 월드시리즈 7차전에서 이기고 있다가 9회 말에 역전패한 것은 1997년 월드시리즈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이후 두 번째였다. 그리고 1991년 월드시리즈 후 처음으로 양 팀 모두 홈에서는 다 이긴 시리즈이기도 하며, 양키스는 그런 시리즈에서 이기지 못한 첫 아메리칸 리그 팀이기도 했다.
데릭 지터는 시리즈 내내 2할의 타율로 부진에 빠져 있었지만, 4차전에서 김병현에게 끝내기 홈런을 때려낸 덕분에 레지 잭슨이 갖고 있던 '10월의 사나이'와 비교되는 '11월의 사나이'라는 애칭을 얻었다. 911 테러 여파로 월드시리즈가 늦게 열리는 바람에 4차전은 10월 31일에 시작했는데, 티노 마르티네스의 동점 홈런으로 연장전까지 가면서 경기 시간이 자정을 넘겨 11월 1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2002년 시즌을 앞두고 팀이 대대적인 정비 경과 아메리칸 리그에서 가장 좋은 103승 58패의 성적을 거뒀고, 알폰소 소리아노는 39 홈런 41 도루로 홈런 1개 차이로 40-40 클럽 가입에는 아깝게 실패했으나, 그래도 30-30 클럽 가입은 2루수 사상 최초였다. ALDS에서 애너하임 에인절스를 만나 패배했고, 애너하임은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거머쥐었다.
2003년 양키스는 101승 61패로 다시금 아메리칸 리그 최고 승률을 기록했고, 로저 클레멘스의 300승과 4,000 탈삼진으로 더욱 빛났던 한 해였다. ALCS에서 보스턴 레드삭스를 만나 7차전까지 열전을 펼쳤는데, 라이벌 팀 간의 신경전이 3차전에서 벤치 클리어링으로 폭발하면서 분위기가 과열되더니, 7차전은 양키스가 8회 말 극적으로 3점을 따라붙으면서 연장까지 가는 혈전이 펼쳐졌다. 결국 11회 말에 에런 분의 끝내기 홈런으로 대미를 장식했고, 보스턴 레드삭스는 또다시 '밤비노의 저주'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월드시리즈에 진출해서 플로리다 말린스와 만났으나 2-4로 패퇴하고 말았다.
2004년 양키스는 역대 최고액으로 텍사스 레인저스와 FA 계약을 맺었던 유격수 알렉스 로드리게스를 계약 기간 도중임에도 불구하고 영입했다. 하지만 팀의 유격수 자리에는 캡틴 데릭 지터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로드리게스는 3루수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ALCS에서 또다시 보스턴 레드삭스를 만났으나, 이번에는 3경기를 먼저 땄음에도 불구하고 4경기를 내리 내주는, 이른바 리버스 스윕의 치욕을 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북미 프로 스포츠로는 3번째) 당했다. 알렉스 로드리게스는 주루 중에 상대팀 수비수의 글러브를 치는 비신사적인 플레이로 비난을 당하면서 이래 저래 수모를 당한 시리즈였다. 보스턴은 그 기세로 86년 만에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하면서 길고 길었던 '밤비노의 저주'와 인연을 끊었다.
2005년, 알렉스 로드리게스는 팀 역사상 1985년 돈 매팅리의 수상 이후 처음이자, 자신의 생애 두 번째 아메리칸 리그 MVP에 선정되었다. 팀은 보스턴 레드삭스와 같은 승률을 기록했으나 두 팀 모두 와일드카드가 가능한 승률이어서 별도의 순위 결정전을 더 치르지는 않고, 상대 전적이 앞선 양키스가 지구 1위로 결정되고 보스턴은 와일드카드 팀이 되어 나란히 ALDS에 진출했다. 하지만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에게 3-2로 지면서 ALCS 진출에 실패했다.
2006년에는 정규시즌에서 레드삭스의 홈인 펜웨이 파크에서 벌어진 5연전에서 총 득점 49-26으로 5게임 모두를 싹쓸이하는 전과를 올렸는데 혹자는 1978년에 이은 '두 번째 보스턴 대학살'이라고도 표현한다. 9년 연속 아메리칸 리그 동부 지구 우승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게 ALDS에서 지게 된다. ALDS가 끝난 후 투수 코리 라이들(Cory Lidle)이 자신의 경비행기를 타고 가다 맨해튼의 아파트와 부딪치는 사고로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그의 죽음은 자신의 경비행기 사고로 죽은 서먼 먼슨의 비극을 다시금 떠올리게 했다.
2007년 6월 18일, 양키스는 사상 최초로 두 명의 중국 선수와 계약하고, 중국 기업과 광고 계약을 맺음으로써 중국 시장 개척의 신기원을 열었다. 2007년 그들의 아메리칸 리그 동부 지구 연속 기록은 9에서 멈췄으나 와일드카드로 ALDS에 진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게 패하면서 3년 연속 1라운드에서 떨어지는 실패를 맛봤다. 시리즈가 끝난 후 조 토리는 그의 능력에 의구심을 표하는 프런트가 제시한 짧은 기간의 재계약 제의를 거절하고는 내셔널 리그 서부 지구의 LA 다저스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양키스의 조 토리 시절 이조 토리가 떠난 후 양키스는 90년대 후반 팀에서 뛴 적이 있는 전 포수 조 지라디를 감독으로 임명하고 3년 계약을 맺었다.
2008년은 역사가 오래된 구 양키 스타디움에서 치르는 마지막 시즌이었다. 마지막 시즌을 기념하기 위해 2008년 메이저 리그 야구 올스타전이 7월 15일에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렸다. 마지막 경기는 9월 21일 볼티모어와 치렀으며 7-3으로 승리했는데 4회 말 호세 몰리나가 날린 2점 홈런은 구 양키 스타디움의 마지막 홈런이 되었다. 경기 후 데릭 지터는 관중들에게 한 연설에서, 그들의 성원에 감사하며, 이 경기장을 기억에 담고, 새 양키 스타디움에서의 새로운 기억을 거기에 더해 여러 세대를 거쳐 지속되게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런 후 선수들은 프랭크 시내트라의 노래 '뉴욕, 뉴욕' 소리가 가득한 가운데 경기장을 돌며 관중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성적면에서는 선수들의 부상으로 시즌 중간에 여러 번 라인업이 변동했고, 이 때문에 14년 만에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시즌이 끝난 뒤, 마크 테세이라, CC 사바시아, A.J. 버넷과 같은 거물급 자유계약 선수를 영입해 팀 전력을 보강하면서도, 이전과는 달리, 조바 챔벌레인이나 필 휴즈 같은 젊은 투수 유망주도 쌓아두는 전략을 원칙으로 삼았다.
2009년 시즌부터 새 양키 스타디움에서 경기를 치렀고, 금세 홈런이 잘 나오는 구장으로 유명해졌다. 5월 14일부터 6월 1일까지는 18경기 연속 무실책 경기로 메이저 리그 기록을 세웠다. 올스타전 휴식 무렵, 양키스는 52승 22패를 기록하고 있었고, 결국 AL 동부 지구 1위를 3년 만에 탈환했다. ALDS에서 트윈스를 3-0으로 물리치고, ALCS에서 에인절스를 4-2로 물리치며 지난 7년 동안 두 번이나 발목을 잡혔던 원한을 풀었다. 월드시리즈서 전년도 챔피언이자 박찬호가 불펜투수로 뛰던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상대로 4-2로 무찌르며 그들의 27번째 월드시리즈 타이틀을 쟁취했다.
2010년 시즌은 양키스와 보스턴 간의 라이벌전이 되살아난 시즌으로 특징지을 수 있을 것이다. 양키스와 보스턴은 펜웨이 파크에서 개막전과 시즌 마지막 경기를 치렀는데 이건 1950년 이후 처음이다. 6월에는 조 토리가 다저스에 부임한 이래 처음으로 양키스와 맞붙기도 했는데, 양키스가 2승 1패의 전적을 거뒀다. 2010년 올스타전 동안 오랜 기간 양키스의 상징이었던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아나운서이던 밥 셰퍼드가 7월 11일에 죽은 지 이틀 후 구단주 조지 스타인브레너마저 세상을 떴다. 8일 후 또 다른 상징이었던 랠프 훅 전 감독마저 사망했다.
2010년 지구 1위 탬파베이 레이스에 이어 와일드카드를 획득해 ALDS에서 전년도에 이어 또다시 미네소타 트윈스를 상대로 3-0으로 이겼다. 하지만 ALCS에서 클리프 리를 앞세운 텍사스 레인저스에게 4-2로 패하면서 2010년 시즌은 끝이 났다.
흔들리는 시기(2010년~2016년)
2017년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격돌하게 되었는데, 양키스 입장에선 댈러스 카이클, 저스틴 벌랜더라는 對양키스 괴수들이 나오는 경기에선 지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한 예측대로 1,2차전엔 완벽히 짓눌렸으나 3차전엔 사바시아의 활약으로 압승, 4차전엔 소니 그레이마저 나쁘지 않은 투구를 한 덕분에 추격의지를 온존하고 경기 후반에는 포스트시즌 내내 부진하던 저지의 부활로 역전에 성공, 홈에서 클린치당하는 꼴은 면했다. 5차전은 다나카의 호투로 시리즈 스코어를 역전하며 다시 휴스턴으로 원정을 떠났지만, 결국 6, 7차전에서 부진한 원정 공격력을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하며 아쉽게도 월드 시리즈 진출에는 실패했다.
양키스의 2~3년은 걸릴 거라 생각했던 리빌딩은 1년 만에 마무리되었고, 지라디 감독은 10년간의 양키스 감독 생활을 마무리했다.
2018년
오프시즌, 지라디 감독의 후임 감독으로 2003 ALCS 7차전 끝내기 홈런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애런 분을 선임했다.
현지시간 2017년 12월 8일, 마이애미 말린스와 지안카를로 스탠튼 트레이드에 합의했다. 그리고 현지시간 12월 11일 스탠튼의 메디컬 통과로 정식으로 트레이드되면서 공식적으로 입단했다.
2018 아메리칸 리그 와일드카드 게임에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상대로 7 대 2 승리를 거두며, 2018 아메리칸 리그 디비전 시리즈에 진출하여 보스턴 레드삭스와 14년 만에 포스트시즌 시리즈 맞대결을 펼치게 되었다. 펜웨이 파크 원정에서는 선승을 내준 뒤 2차전에서 데이비드 프라이스를 두들기며 1승 1패로 마무리하고 홈으로 돌아왔으나 3차전에서 16:1이란 치욕적인 스코어로 관광당하고 이 충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4차전까지 4:3으로 지면서 세트스코어 3:1로 디비전시리즈에서 탈락. 정규시즌에 이어 또다시 안방에서 보스턴의 잔치상을 만들어주고 말았다. 특히 3차전은 MLB PS 최다 점수차 패배 기록을 경신한 데다가 레드삭스의 브록 홀트에게 힛 포 더 사이클까지 헌납했는데 이게 MLB PS 최초 힛 포 더 사이클이다.
2019년
시즌 종료 직후 시애틀로부터 선발투수 제임스 팩스턴을 영입하였다. 대가로 양키스는 팜 상위 유망주인 저스티스 셰필드를 포함한 유망주 3명 패키지를 내줬다.
오프시즌에는 브라이스 하퍼나 매니 마차도와 같은 선수와 연결되고 있었다. 특히 뉴욕 양키스 팬을 자처하는 마차도와의 계약에 집중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토론토가 방출한 트로이 툴로위츠키를 최저 연봉으로 주워왔다. 장기 부상 중인 디디 그레고리우스의 백업으로 영입한 듯. 그러고 나서 잭 브리튼을 3년간 평균 13M에 계약했고, 마차도에 집중할 것이라는 세간의 반응을 깨는 2루수 DJ 르 메이휴를 2년 24M에 잡았다. 미겔 안두하나 트로이 툴로위츠키 등의 수비력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2루수-유격수-3루수까지 책임질 멀티 수비자원으로 기대하고 잡은 게 아닌가 하는 예상이 많다. 그리고 FA 불펜 아담 오타비노까지 3년 2700만 달러에 영입하면서 오타비노 - 그린 - 브리튼 - 베탄시스 - 채프먼으로 이어지는 지구 최강급의 불펜을 갖추었다.
원정경기에서는 잘했다지만 에이스로서의 기대치에 전혀 못 미쳤고, 제임스 팩스턴의 영입과 CC 사바시아의 재계약으로 선발진의 계륵 신세가 된 소니 그레이는 신시내티 레즈와 시애틀 매리너스가 낀 삼각 트레이드를 통해 레즈로 보냈다. 대가는 외야 유망주 조시 스토워스, 좌완투수 리버 산 마틴, 36순위 신인 지명권.
<LA 다저스 샌디에이고 홈2차전>
2019년 8월3일 11시10분 LA다저스와 샌디에이고 홈 2차전. 다저스 4번타자 벨린저는 통산 400번째 안타이자 100번째 홈런으로 1-2 로 역전을 만드는 2점 홈런을 날렸다. (401경기 400안타 100홈런 201볼넷). 데뷔전을 치른 다저스의 최고의 유망주 투수 더스틴 메이는 5회까지 1실점(비자책)으로 호투했다. 하지만 6회 1사후 연속3안타 맞아 2-2 동점을 허용후 계속된 2사 1,3루 위기에서 네일러에게 역전 2타점 2루타를 맞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4-2. 5.2이닝 4실점 3자책(9피안타 0볼넷 3삼진) 총투구수 97개. 상대투수 에릭 라우어는 6이닝 6K 2실점(3피안타)로 승리투수가 되었다. 샌디에이고는 추가로 1득점하며 7,8,9회를 불펜이 잘 막아 승리를 지켜냈다.
샌디에이고(51승58패) 5-2 다저스(72승40패)
한편 류현진 선수는 휴식차원에서 10일짜리 부상자 명단에 올랐다.
추신수 선수성적 : 4타수 무안타(0.276.371.482) 디트로이트(32승73패) 4-5 텍사스(55승54패)
강정호 선수는 피츠버그에서 계약이관공시가 됐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 트레이드나 클레임을 통해 강정호를 데려가는 팀이 나타나지 않으면 강정호는 FA를 선언하거나, 피츠버그의 마이너팀으로 내려가는 선택을 할 수 있다.
강정호(32)와 피츠버그 파이러츠 원계약 : 2015년 4년 1100만 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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